이원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집 저집으로 옮겨다니지 말라.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 왔다고 전하여라.” (루가 10:5~10)

서구 선진국들이 펼치고 있는 복지정책의 완결성을 두고 흔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쓴다. 자본주의의 폐해, 특히 물신주의(物神主義)의 만연에 따라 소외계층은 확대 되는데 이들에 대해 뒷받침할 제도적 장치가 없을 때 그 폐해는 심각한 문제를 동반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고 형제가 형제를 버리고 자매가 자매를 버리는 반인륜적인 행태는 바로 ‘돈이 곧 행복’이라는 저급한 인식이 우리들 가슴 속에 독버섯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꽃동네는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과 행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곳이다. 꽃동네의 모토가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그 곳은 ‘돈이 곧 행복’이라는 우리사회의 등가(等價) 공식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린 곳이라 할 수 있겠다. 꽃동네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돈과 행복이 등가관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라는 다소 ‘황당’한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볼 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바로 그 꽃동네 정신이 제 자리를 찾아 큰 힘을 얻고 기적을 행하고 사회의 음습한 곳을 따뜻하게 비출수 있었던 것은 그 근간에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꽃동네 인사는 그래서 ‘사랑합니다’이다. 처음 만나게 되는 낯선 이에게 꽃동네사람들은 주저없이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를 나눈다. 사랑을 배우러 꽃동네 사랑의연수원을 찾은 이들은 그런 익숙하지 않은 인사법에 처음엔 당혹해한다. 그러나 어차피 사랑을 배우러 온 것. 그들은 ‘사랑합니다’라는 인사법보다 더 아름다운 인사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말은 정확하게 꽃동네에 해당되는 말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천사의집, 이 아기들이 자라면 대부분 맹동초등학교 특수학급에 들어가게 된다. 부랑인과 노숙자들을 돌보는 꽃동네 본동과 평화의집과 애덕의집. 그리고 병약한 노인들을 돌보는 노인요양원. 정신과 환자들을 돌보는 정신병동과 중환자들을 치료하는 인곡자애병원, 가평꽃동네의 노체리안드리자애병원. 심신지체장애인들을 돌보는 희망의집. 그리고 이들 가족이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고 피안(彼岸)의 저 쪽 세상으로 건너가게 되면 꽃동네 묘지에 묻히게 된다.

덧붙이면, 꽃동네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랑의연수원은 일반 사회인들과 직장인들, 그리고 전국 각지의 초·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꽃동네가 추구하고 있는 사랑의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하고보면 꽃동네는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복지뿐만 아니라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도 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오웅진 신부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그 고민은 천사의집 아기들 가운데 중증(重症) 중복장애인 아기들이 자랐을 때 그들을 교육시키고 세상의 모습을 알려줄 시설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학교가 한국에서 장애아 특수학교로는 가장 완벽한 시스템을 자랑하는 ‘꽃동네학교’다.

꽃동네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기까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가 초대 꽃동네학교장으로 부임한 이원우 선생(67)이다. 그러나 정작 이 선생이 꽃동네학교의 책임자로 부임하기까지는 우연치고는 너무도 신기하고, 행복이라고 하기엔 너무 안쓰러운 사연이 묻어 있다. 이 선생은 평생을 교육계에 투신해 온 사람이었다. 평교사로 시작하여 중·고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 몸 담았고 정년을 앞두고는 음성교육장을 역임했었다. 꽃동네와의 인연은 여기에서 시작된다.“정년퇴직을 앞두고 여기저기 각 기관에 인사를 다녔지요.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였지요. 꽃동네에도 인사차 왔어요. 그때 오웅진 신부님께서 물어보시더군요. 정년 후 무얼 할거냐구요. 그때 전 모 신문사에서 벌이고 있는 사업에 참가하기로 8개월 전에 약속이 된 상태였고 9월 1일부터 일을 하기로 했던 거였어요.”이 선생은 오 신부의 말에 대답했다.“할 일이 있을 것 같아요.”“교육장님 어지간 하시면 그 일 접어두시고 꽃동네로 출근하시죠?”이 선생은 미리 약조한 것 때문에 선뜻 응낙을 할 수 없었다.“생각해 보겠습니다.”오 신부에겐 늘 안타까운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꽃동네 천사의집에서 중증장애를 겪어 세상의 모습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그것이었다. 비교적 장애 정도가 가벼운 아이들은 맹동초등학교 특수학급에 입학시키면 되지만 중증 장애아들은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받아줄 만한 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한 오 신부는 자신의 자식들과 같은 그 아기들을 꽃동네에서 직접 가르치는 시설을 만들고자 결심했다.그러나 그 결심은 여러 난관에 부딪혔다. 일단 충북도교육청의 반대가 그것이었다. 예산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도교육청은 학교설립 인가에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도교육청 설득 작업에 이 선생이 적극적으로 나섰다.“교육감님과 함께 일 관계로 해외여행을 할 기회가 생겼지요. 그때 말씀을 드렸어요. 꽃동네에서 설립하고자 하는 학교가 갖는 의미를 말이죠. 결국 교육감님은 수락을 하셨는데 실무자들의 반대가 심한 거예요. 설립하게 되면 도교육청에서 예산을 지원해야 하는데 그게 힘들다는 거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인가를 내주게 돼 꽃동네학교가 태동하게 된 거죠.”이 선생이 꽃동네학교 교장을 맡게 된 데는 기막힌 사연이 있다. 그것은 이 선생의 개인적인 불행과 더불어 시작되는 한 편의 드라마같은 이야기였다. 2000년 11월 8일 이 선생의 몸에 돌연 이상이 찾아왔다.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오는 중풍이었다. 이 선생은 청주 한국병원에 1주일간 입원했다. 그러나 차도가 없었다. 다시 경희대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처음에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며칠 쉬면 나으려니 편한 마음을 가졌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에게 찾아온 병은 생각 밖으로 깊었다. 급기야 일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11월 29일이었어요. 한밤중에 오 신부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이사회에서 교육장님을 교장으로 모시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했으니 앞으로는 꽃동네학교로 출근하라는 전화였지요. 고마운 생각이 들었지요. 그러나 제 몸이 이런데 어떻게 교장일을 수행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대답했죠. 고맙지만 건강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라구요. 오 신부님은 별로 걱정되는 기색도 없이 거침없이 말씀 하시더군요. 걱정말고 치료나 잘 하라구요.”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큰딸이 연락을 해왔다. 그 곳에서 재활치료를 받아보라는 권유였다. 치료도 치료지만 우선 그는 쉬고 싶었다. 쉼 없이 달려온 인생,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일 한 번 하지 않았고, 늘 초심(初心)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성실하고 인내하며 살아온 삶인데, 한겨울에도 내복없이 지내던 건강한 몸이었는데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 것인가?우울했다. 일단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이런저런 문병을 하는 지인들의 관심조차도 버거워졌다. 12월 15일 이 선생은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샌프란시스코로 떠나기 전날 그는 둘째딸 집에서 잤다. 둘째딸이 아버지에게 갖는 걱정이 너무 컸던 탓이었다. 다녀오면 몸 움직일 만할 테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도 건네주었다. 그날 밤 둘째딸의 집으로 오웅진 신부가 예고도 없이 방문했다. 모두들 깜짝 놀랐다. 찾아온 오 신부는 태연하게 이 선생에게 말했다.“아무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다녀오시기 전에 우리 교육장님께 제가 안수기도 올려드리지요.”“신부님 전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왜 그렇죠?”“첫째로 저는 중풍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습니다. 제 몸이 이런데, 제게 해주시는 배려는 너무 고맙지만 꽃동네에 걸림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주님의 뜻입니다. 선생님께서 중풍에 걸리신 것은 꽃동네학교를 운영하기 전에 그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몸으로 느껴보라는 계시입니다. 중풍은 가벼운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나을 것입니다. 사모님도 함께 오셔서 봉사하십시오.”“둘째로 저는 개신교 신자입니다. 꽃동네는 천주교 재단 아닙니까?”“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주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종교가 다르다고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세째로 전 정년퇴직한 몸입니다. 이제 늙은 몸인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게다가 몸까지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기독교인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일을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분입니다. 늙은 몸이라고 일을 할 수 없다고 걱정하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겪어본 사람만이 고통을 겪는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리를 마련해놓을 테니 다녀오시고 꽃동네로 꼭 오세요.”이 선생은 할 말을 잊었다.“처음엔 저 분이 ‘병신’ 몸을 한 나를 데려다 쓴다니 정신이 있는가 싶었지요. 사회에선 부임이 약속됐다 하더라도 중풍에 걸리면 ‘유감스럽지만 안 된다’라고 하는게 보통인데 저토록 정성을 기울이시는 것을 보면 참 범상한 분은 아니다 싶었어요. 그리고 신부님 말씀을 조목조목 듣고보니 틀린 구석이 한 군데도 없더군요. 결국 승낙하게 됐지요.”이 선생이 미국에 가 있는 동안 꽃동네에선 이 선생의 교장 승인을 받았다. 처음엔 정년퇴직한 처지라 도교육청에선 교장 임명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오 신부는 판공비를 꽃동네에서 지급한다는 약속을 하고 이 선생의 교장 승인을 얻어냈다. 이 선생은 미국을 다녀오면서 꽃동네학교를 찾았다. 오 신부는 며칠 푹 쉬었다 출근하라 했지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꽃동네 학교를 한시라도 빨리 보고싶은 마음에서였다.건물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교장실 책상 위에는 이 선생의 명패가 놓여있었다. 침실과 화장실까지 구비된 교장실이었다. 오 신부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3월 15일 이 선생은 꽃동네학교 초대교장으로 부임했다. 이 선생은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낸다. 청주 우암교회에서 장로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탓에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꽃동네학교를 방문하곤 한다. 그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하는 말, “이곳이 바로 천국이네요. 장로님의 몸을 이렇게 만드신 것은 꽃동네에서 봉사를 하시라는 하느님의 말씀이신가 봅니다.”이 선생은 이 곳이 너무 좋단다. 교육장까지 지낸 화려한 경력이 있지만 작은 특수학교 교장으로 있는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한다. 이 곳에서 생활하며 그는 평생 봉사를 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곤 한다.“여기 아이들이 너무 좋습니다. 아이들은 저를 보고 절대로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제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저보고 할아버지라고 부른답니다. 절뚝절뚝거리는 할아버지니까 녀석들이 더 좋아해요. 자기들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해서인가 보죠.”이 곳에선 수사가 삼촌이고 수녀는 이모다. 할머니도 있다. 이 곳에서 할머니는 이 선생의 아내 장영상씨(63)다. 장씨는 한방의료선교단에서 2년간 수료했다. 간단한 침술과 지압, 안마를 배웠는데, 그 기술이 남편의 중풍을 고치는데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장씨가 한방의료를 배우게 된 것은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결심에서였다. 1993년 한방의료선교단을 수료한 뒤 1995년까지 모스크바와 태국 치앙마이, 필리핀 등지에서 의료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남을 위해 배운 것이 이젠 공교롭게도 배우자를 위해 쓰이게 된 셈이다.“아내에게 참 미안합니다. 제 몸 굳지 않게 하기 위해 시도때도 없이 주무르고 지압하고…… 게다가 꽃동네학교 아이들에게 할머니처럼 다정다감하게 이것저것 챙겨주느라 늘 하루가 짧지요. 늘 고된 하루를 맡겨놓는 듯해서 너무 미안하죠.”이 선생은 예상보다 중풍이 훨씬 호전됐다. 이제 목발 짚고 걸을 수 있고 손과 발도 조금씩 놀릴 수 있다. 처음엔 마음의 고통도 겪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교만해진 자신의 마음을 꺾어주기 위해 내리신 은총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장애인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고 그들과 더불어 봉사의 삶을 살라는 하느님의 뜻으로 인해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다.
꽃동네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한 풍경.
생각이 많이 모자라는 지연이는 물 떠다주는 잔심부름을 제 일로 여기고 있다. 누구라도 식사를 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지연이는 밥을 먹고 있는 낯선 이에게 물을 떠다준다. 그리고 지연이의 앙증맞은 인사법, 꼬옥 껴안아 주는 것으로 반가움을 표시한다.

만성체증으로 올챙이배가 돼버린 예성이는 한 달에 한 번 자원봉사차 침을 놓으러 오시는 김종대 할아버지의 침을 맞고는 비명을 지른다. 죽을 상을 하고 있는 녀석에게 장씨가 안마와 지압을 해준다. 다정한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모습이다.

유치부에 있는 다빈이는 누가 와도 큰절을 올린다. 그런데 녀석의 절하는 폼새가 여간 우스운게 아니다. 개구리 모양으로 펄쩍 뛴 다음 바닥에 온몸을 쿵 찧으며 올리는 절이다. 절을 하는 것인지 개구리가 펄쩍펄쩍 뛰어가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부족하지만 진지한 그들의 의사 표현법이요, 이 선생에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아름다운 일상의 풍경들이다.

“꽃동네학교는 전국에서 유일한 특수장애아들을 위한 교육 시설입니다. 사실 우리 아이들에게 사회에 환원시킬 수 있는 재활교육까지 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육체적 정신적 장애 정도가 너무 심하게 때문이죠. 그러나 저는 늘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도 여느 아이들과 똑같은 인권을 부여받고 태어났으며, 똑같은 인권을 누리며 살아가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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