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항토사학자

주방용품 중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것은 역시 그릇이다. 밥그릇, 국그릇, 접시, 된장찌개 뚝배기, 술잔, 항아리 할 것 없이 주방의 모든 질그릇은 인류의 생활과 호흡을 같이했다. 갓 시집온 새 색 씨의 한숨소리조차 받아 간직한 배달의 질그릇이다.

미호천의 질그릇 문화는 바닷가나 타지방의 토기문화와 비슷하나 이와 또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주둥이가 널찍하고 배부른 항아리의 모습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성질이나 생활양식도 넉넉히 받아들인 듯 하다. 날렵하거나 화려한 장식은 많지 않아도 이웃과 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삶은 투박한 질그릇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미호천 물을 길어 이웃집에도 나눠주는 베풂의 미덕을 큰 항아리 속에서 들여다보는 것이다.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 민 무늬토기를 거쳐 원삼국 시대에 등장한 미호천 가의 토기는 흑인 입술처럼 입 주둥이가 밖으로 벌어졌다. 임신한 여인처럼 배불뚝이라서 속도 깊다.

송절동, 신봉동 산기슭 아래에서는 이같은 토기가 출토되는데 산 능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시대가 뒤떨어진 이른 백제의 토기가 질그릇 이어달리기의 바통을 받는다. 3~5세기로 접어들면 토기의 모양이 대체로 작아진다. 신봉동 백제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를 보면 속이 깊은 바리형 토기라든지, 남자의 성기를 상징하는 ‘쇠뿔 손잡이가 달린 토기’ 등이 관람객의 눈길을 붙잡는다. 쇠뿔 손잡이는 하늘로 엇비스듬하게 솟아 있다. 또하나의 재미있는 토기는 생맥주 컵 같은 토기다. 토기 손잡이가 오늘날 500cc, 1000cc 맥주 컵과 아주 닮아 있다. 당시 사람들이 맥주 파티를 했을 리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맥주 컵이 아니면 머그잔인가. 정확히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물 또는 여러 곡식을 담아 두었으리라...신봉동에서 출토되는 질그릇은 같은 시기 타지방 백제문화권에서 출토되는 토기와 또 다르다.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지난 1982년부터 이곳을 발굴한 충북대 박물관 팀은 이를 ‘신봉동식 토기’라 명명했다. 여기에서는 백제토기만 출토되는 게 아니다.

충북이 삼국의 정립지대여서 그런지 토기 또한 삼국의 혼합 양상을 보여준다. 몸통이 길거나 토기의 최대지름이 어깨부분에 와 있는 토기는 고구려 계열인데 이같은 토기도 더러 출토된다. 몸통의 최대 지름이 토기 가운데에 있는 것은 ‘송국리형 토기’다. 부여 송국리에서 나온 토기로 청동기 시대부터 내려온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데 신봉동 토기는 항아리나 속 깊은 토기가 많다. 토기는 그 둥근 형태로 열 전도의 균형을 잡으며 점성의 물성은 공기를 통하게 한다. 김장독에서 김치가 숙성되고 제 맛을 내는 것은 이런 이유다.

토기는 섭씨 800도 안팎에서 구어 진다. 당시 장작으로 열을 낼 수 있는 한계가 이 온도다. 그 후 1200~1300도까지 열을 더 높이는 방법이 나와 도자기가 출현하게 된다. 충청도 사람들은 미호천의 질그릇을 닮았다. 투박한 질그릇에 정을 담고 정을 나누어주었다. 그야말로 ‘투가리보다 장맛’이다. 뚝배기는 겉멋은 없으나 일단 데워지면 잘 식지 않는다. 세상인심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데 장맛은 그대로다. 가변성 속의 불변성, 그것이 충청인의 정서다. 신봉동 백제유물관에서는 백제토기전을 열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백제 토기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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