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아침. 몸이 젖은 이불처럼 무거웠다. 초등학생 딸이 학교 가는 것을 마중하고 자리에 누웠다. 암막 커튼 사이로 빛이 스며들었다. 창문보다 크게 주문했어야 했는데 안방 창문을 겨우 가릴 정도이니 매번 매무새를 만져야 했다. 세 시간 남짓 잠을 자고 일어나면 적당히 배가 고팠다. 점심을 차려 먹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마당에 나가 보는 것이다. 지난 늦가을부터 거실에 대피해 있는 커피나무, 부채 야자, 멕시코 소철, 카틀레야, 올리브나무를 위해서도 날씨를 살피는 일은 중요한 동작이었다. 부드러운 햇살과 적당한 바람이 무거운 머리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문득 냉이를 캐고 싶었다. 로컬푸드 매장을 들를 때마다 농민들이 들에서 캔 냉이가 나오는 것을 봐둔 터였고 날씨로 봐서는 냉이를 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몇 년 전부터 냉이를 캐는 것은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는 통과의례였으니 마음이 설렜다. 유년 시절에는 냉이가 지천이었는데 요즘은 냉이가 자라는 밭을 찾기가 쉽지 않다. 빈 들에 홀로 앉아 첫 번째 캔 냉이를 코에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싱그럽다. 그런데 어느새 잔뿌리가 수북하다.

봄이 온 것 같다고 짐작은 했으나 언 땅에 납작 엎드렸던 냉이는 벌써 알고 움을 틔우고 있었다. 삶은 뜨겁다고 푸념했던 것이 무색하다.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추상적이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것. 조금 구체적으로 보자면 비보호 좌회전은 비보호 좌회전 표지가 있는 곳, 녹색 신호에서 전방 차량에 방해가 되지 않게 진행하는 것이지 전방에 차량이 없다고 신호 불문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가끔 찌개나 반찬을 할 때도 인터넷에서 검색한 요리법을 따라 하고 목적지를 찾아갈 때는 내비게이션을 구동시켰다. 과연 나는 나인가?

지금 우리가 사회에서 목도하고 있는 것들, 이를테면 정치는 국민을 생각하기보다 지신들의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 검찰은 스스로 헌법과 법치를 논할 자격이 있는지 도대체 의아하다는 것. 학교 폭력의 문제는 비단 과거 한때의 잘못으로 치부될 수 없음에도 사회와 기성세대는 어물쩍 넘어가려 하고 있다는 것. 공공기관 역시 다른 권력 집단과 다르지 않고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드러난 부정에 대해 불쾌하게 반응한다는 것.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짐작하는 것인가. 이도 저도 아니라면 나와 무관한 일이므로 모른 척 넘어가야 할 것인가?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사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듯 정치인은 서로 악다구니 쓰고 권력 기관은 힘의 세기만큼 세상의 정의를 독식하고 언론은 자극적으로 받아쓰는데 도가 텄다. 봄이 온 듯한데 세상 힘 있는 자들이 하는 짓을 보면 국민은 그저 국토를 유지하고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구성요소에 불과한 느낌을 받는다. 적당히 월급 받고 적당히 놀고 적당히 살고 그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말 것!

더럽고 치사한 정치꾼과 자본과 권력이 상부상조를 위해 만든 수많은 카르텔에 저항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봄을, 계절을 지켜내는 것이다. 삐죽삐죽 돋아난 새싹을 목격하고 잠시 앉아 그 경이로움을 생각하는 일. 그 여린 힘에서 위안을 얻고 그리운 사람을 떠올리는 것. 아니라고 손사래를 쳐도 그리운 사람이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반드시 투표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 꽃을 보는 마음으로 가족들과 이웃을 존중하는 것. 그리하여 이 나라는 돈과 권력이 아니라 사람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저급한 욕망에게 밥 냄새 같은 향기로 되돌려 주는 것.

노란 생강나무꽃이 폈다는 소식이다. 정말 봄이 오면 얼마나 희고 빛날 것이냐. 마스크를 썼던 얼굴마다 앵두꽃 같은 웃음이 벙글고 ‘감사하다.’, ‘고맙다.’라는 말이 언 땅을 뚫고 솟은 통통한 새싹처럼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다. 다시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될 때, 먼발치서 그리운 사람이 다가오고 있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서 속삭여 보듯 그 간절함으로 이번 봄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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