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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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는 살아있다
  • 이재은
  • 승인 2021.02.2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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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류의 평등에 관한 문제를 법으로만 정당화시키려 한다면 언어의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너무 오래된 부조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언어를 조리 있게 구사해도 모두를 납득시키기엔 역부족이라고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갈구하는 외침은 희미하지만 오래 전부터 이어져 내려왔다. 비겁하게 살아가기엔 우리의 마음에 존재하는 양심이 나침반처럼 바른 길을 가리키기 때문일 것이다.

정의에 입각한 양심이라면 법문에 적힌 어떤 조항보다도 강력한 무언의 힘을 지닌다. 양심을 속이는 일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조종당하게끔 하는 족쇄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내가 그렇다. 양심이 귀띔하는 대로 하지 않고 편하고 편리하게 타협했을 때 속이 몸만큼 편치만은 않다. 주변을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피게 된다. 나다운 말과 생각을 드러내기보다 주변의 정황에 맞추기 급급해진다는 것이다. 마음이 신산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한 태도가 드러난다. 양심은 내가 하고 싶은 일, 자기만의 신념이다. 자신에게는 근검절약의 신념이라면 타인의 눈에 궁색함으로 보여도 상관없다. 큰소리로 무한 반복하는 노래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지각있는 앵무새의 말처럼 나름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랴.

‘하퍼 리’ 장편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등장인물인 ‘에티커스 핀치’는 자애롭고 자비로운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정의롭고 또한 인내심 강한 변호사이다. 한결같은 신념이란 무엇이며 신념을 저버리지 않으려 어떤 고난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가 보여주는 신념이 오늘날 내가 고민하고 지켜야 할 양심이 아닐까 한다.

소설에는 ‘스카웃’이라는 한 초등학생을 중심으로, 흑인과 백인 사이에 벌어진 일에서 흑인을 옹호하는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 오빠 ‘젬 핀치’,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부 래들리’ 등이 등장한다. 한 정의로운 백인 변호사가 백인 여자를 성폭행 했다는 혐의를 받던 흑인을 변론한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당시 사회의 흑인 차별과 군중심리에 묻혀 개인의 주관적 지식을 묵살해 버리는 사회를 아이들의 순수한 눈으로 바라본 소설이다.

‘에티커스 핀치’의 남매 ‘젬’과 ‘스카웃’의 눈에 비친 온갖 불평등이 그 둘의 때 묻지 않은 양심이라는 수면 위로 드러난다. 낯이 두껍지 않은 이 아이들은 인종 차별이, 양성 차별이, 다름에 대한 편견이 모두 멀미가 날 정도로 비위가 상하는 일이다. 낯이 두꺼워진다는 것은 양심 위에 덧씌워진 편협한 사고의 때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당당하지 못한 사람의 얼굴이 두껍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젬’과 ‘스카웃’의 순수한 호기심과 편협함이 없는 마음을 조종하는 것은 어른이었다. 불평등을 조장하고 편견을 주입하는 사람 또한 어른이었다. 깨끗하고 용감한 아이들의 양심을 탁하고 둔하게 만드는 무책임한 행위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보호자는 어른이다. 어른의 역할을 다룬 소설로 읽고 싶었다.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을 갖춘, 아이들의 진정한 보호자로 등장하는 인물이 ‘에티커스 핀치’ 변호사이다. 그는 한결같다. 말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 없으며 그의 말은 정의 자체로 느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어떤 것에도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이며 신중함이다. 비겁함을 숨기고 뒤로 내빼려는 꼼수는 아니라는 말이다. 정의에 있어 따뜻하고 단호한 반면 부당한 것에는 누구보다도 냉철하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아이들이 답습할 부분이 있음을 알기에 진중하고 침착할 수 있기를 부단히 노력하는 인물이다.

‘에티커스 핀치’ 변호사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서 형용사를 모두 빼면 무엇이 남는 줄 아니? 진실만 남는단다.” 단순 명료한 자신의 양심이 흔들리지 않기를 얼마나 기도하는지 자신의 투명한 양심에 비춰 볼 아이들의 세상이 맑고 밝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젬’과 ‘스카웃’이 그런 아버지의 바람대로 성장한다면 누구보다 강건한 신념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은 차별, 편견에 대한 어른의 비양심을 비판한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 할 수 없다”는 에티커스 핀치의 말처럼 타자와의 대화가 만들어 낼 공감이라는 가능성을 아이들의 순수한 눈을 통해 감동적으로 그려내며 정의와 양심, 용기와 신념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거기에 인간의 편향적인 본능도 뒤집어 보여 준다. 사회의 문제가 복합적이기는 하나 우리의 양심이 바로서고 옳은 신념을 지닌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단순한 해결책도 언급한다. ‘앵무새 죽이기’에 빠져들수록 평등, 차이, 다름에 관한 문제보다는 사회적인 어른의 부재로 인해 야기되는 또 다른 문제를 떠올렸다. 스스로 퍼부은 숱한 질문이 그래서 부끄러웠다. 나는 어떤 어른인가. 나의 양심은 과연 양심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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