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 그렇다고 죽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 오히려 삶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 산다. 학생은 전교 1등을 하여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성공한 삶을 살고 싶다. 작은 가게는 장사가 잘 되어 확장할 수 있으면 좋겠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되고 싶다. 지역은 인구수를 늘리고 경제력을 올려야 한다. 국가는 강대국이 돼야만 한다. 온통 커지기를 바라는 우리 사회는 소멸 없이 무한히 분열하는 암세포가 되고 싶은가 보다.

그런데 단 하나 소멸을 위해, 죽음을 목표로 사는 존재가 있다. 그것은 시민단체이다. 조금 슬프지 않은가. 죽기 위해 살아있다니. "시민단체는 소멸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재작년 한 컨퍼런스에서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지만 이내 바로 이해하고 납득했다. 그러곤 굉장히 먹먹해졌다. 어떤 곳은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를, 어떤 곳은 정의 사회를, 어떤 곳은 자본으로부터 미래를 보호하는 사회를 꿈꾼다. 그들은 활동을 통해 꿈꾸던 사회가 실현되고 스스로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 소멸하길 꿈꾼다.

그런 날이 오면 정말 좋겠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까마득할 뿐이다. 386세대 운동의 성공으로 고문 받지 않고 죽임 당하지 않을 사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 더욱 세분화된 오늘날의 가치들은 아직 보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이 아직 알지 못하는 가치는 당당히 혐오해도 된다 여기기도 한다. 자본은 어디서든 강력함을 발휘한다. 그 힘은 너무나 커서 자본과 경제적 약자의 대결을 더 이상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할 수 없다. 굳이 표현하자면 활활 불타오르는 태양에게 한판 붙어보자며 주먹 불끈 쥔 먼지 같다. 정책 수립 과정에서도 시민단체 지우기는 은밀하게, 혹은 대놓고 진행된다. 그나마 기존엔 조례 등에 시민단체가 명시되어 간신히 정책 결정권자만이 아닌 시민의 목소리를 더할 수 있었으나, 최근 그 이름을 지우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득 보는 자를 찾아보라. 시민단체를 지우면 안 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시민단체의 꿈인 '목적을 이룬 영광스러운 소멸'은 불가능한 걸까. 시민단체를 먹잇감 삼아 강제 소멸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과거 시민의 마이크 역할을 하던 언론은 이제 돈줄인 지자체와 자본의 마이크가 되었고, 권력의 유일한 눈엣가시인 시민단체를 공공의 적으로 여기게 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시민단체가 권력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거나 자정 과정에 있는 시기는 빈틈이 되어 그들이 공격하기 가장 좋은 순간이 된다. 빈틈 속에 숨겨진 본질은 사라지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일이 팩트 인양 원색적으로 포장되어 손쉬운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나마 돈 없고 빽 없는 시민단체의 미미한 목소리가 그들에게 상왕(上王)처럼 엄중하게 여겨진다 하니 다행이라 위로해야 하는 걸까.

'시민단체가 공정성과 객관성을 내팽개친 채, 자기 권력적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시민단체란 그 힘이 태생부터 지닌 소멸 지향성에 있어 구조적으로 그것들을 내팽개칠 수 없다. 시민단체는 자신이 지향하는 사회에 도달한 순간,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시민단체의 존재 자체가 아직 그들의 꿈이 사회에 필요함을 말한다. 일종의 사회 암세포 알리미이다. "여기 암세포 있어요~" 하고 사회에 존재하는 암세포를 알리는 역할을 다하곤 자연히 사라질 존재. 때로는 좌충우돌, 자주 우왕좌왕 하지만 그래도 암세포의 무한 분열 같은 세상 속에서 소멸을 위해 사는 이 외로운 존재가 모두의 적이 아닌 모두의 동료로 여겨지길 나는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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