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주인공의 멍하니 읊조리던 대사가 생각난다. 별 것 아닌 일에 자꾸 화가 난다고. 그녀에게 별 것 아닌 일이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하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들이다. 변함없이 돌아가는 일상일 뿐인데, 아무도 몰랐던 이유로 그녀는 화가 나 있다. 평범하게 교육된 성차별로 아물지 않은 상처, 전통적인 성역할을 강요받느라 곪은 속을 그제야 들여다 본 모양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은 모두에게 읽어준다. 여자라는 태생적, 사회적인 성격을 근거로 교육, 결혼, 일상생활, 노동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누려야할 당연한 권리와 행복을 제한받아야 했던 사실을 말이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공공연하게 쏟아지는 틀린 시선에 존엄성과 정체성이 병들어버린 인간 “김지영”을 숨죽여 바라보았다.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살아야 하는 서러움, 내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삶이 결정되었다는 좌절감, 부당한 상황을 견뎌내야 하는 억울함,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산다는 두려움이 비단 성차별이라는 불합리한 상황에서만 일어나는 감정이겠는가.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매 순간, 모든 상황마다 성난 파도처럼 우리를 집어삼키는 위험한 감정이 아닌가 싶다.

 

21세기는 개성을 존중하고 다양성을 격려하는 사회이다. 하지만 다양한 차이들이 일상적인 삶 속에서 얽히고설켜 있어 부조리한 차별로 이어지는 사회이기도 하다. 다른 모습을 틀리다고 보는 시선, 틀린 생각을 고집하는 태도 때문이다. 틀리다는 시선은 옳고 그름, 가치와 무가치, 소수와 다수, 주류와 비주류, 정상과 비정상, 우성과 열성을 판가름 짓는 획일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의 잣대로 존재한다. 마치 오른손잡이가 바른손잡이로 규정되는 것처럼 말이다.

 

젠더, 학력, 외모, 빈부, 인종, 이념, 종교, 국적, 지역적인 차이는 여러 가지 범주화를 거치면서 변모한다. 신념 차원의 고정관념, 감정 차원의 편견, 행동 차원의 차별적 태도로 말이다. 다양성을 배제한 좁은 사고, 근본 없는 우월주의, 자기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타인 억압, 불합리하고 편파적인 태도는 혐오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은연중에 맞닥뜨린 싸늘한 감정에서 사회적 거리감을 체감하지 못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틀린 사람이라고 구분되는 기분은 어떤가. 소외되어 사회의 주변으로 내몰린 우울과 분노를 누가 경험하고 싶겠는가.

 

우리는 모두가 다름의 존재이다. 다른 외모, 다른 목소리, 다른 사고, 다른 감정, 다른 가치관으로 저마다의 역량과 잠재력을 표현한다.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보장된 사회에서 우리는 존중받는 개별적 존재로서의 확신을 갖는다. ‘나’로 표현된 개인은 인간이라는 동일성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니며, 이에 상응하는 것이 개인의 차이나 진정성에 대한 인정으로 이어진다. 상호 인정 관계는 나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고 소외와 혐오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된다. 인간 존중과 공동체적 연대감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를 잇는 다리가 된다고 믿는다. 여자 남자, 흑과 백, 동양과 서양, 부자와 경제적 약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경계선이 사라진, 다채롭기에 조화로운 사회를 꿈꾸기에 이만하면 충분하다.

 

지나친 겸손과 양보, 자기 낮추기는 이제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마음껏 표현하고 서로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만과 편견을 버리고 차이를 인정하는 열린 시선의 중요성을 기억해야겠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은 기적은 인식의 틀을 깨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영화 말미에 김지영은 자신에게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들을 향해 쓰디 쓴 마음을 쏟아낸다. 내가 어떤 일을 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느냐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상처주기 위해 그리도 애를 쓰냐고. 그간의 서러움, 좌절감, 억울함을 날려 버린 듯 시원했을까. 아니면 상처받은 약자라는 굴욕감에 쪽팔렸을까. 딸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가 아닌 인간 김지영으로서의 대답은 결연했다. 시원하지도 쪽팔리지도 않고 그냥 좋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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