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극적인 죽음을 둘러싸고 수많은 프레임이 쏟아지고 있다. 성추행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니 차치하고서라도, 확실한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 미투 운동에 심각한 2차 가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화를 읽을 때처럼 우리가 마주하는 인물들을 착한 놈, 나쁜 놈으로 딱 분류할 수 있다면, 그래서 때려잡아야 하는 나쁜 놈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고, 권선징악의 형태로 모든 일이 마무리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다. 하지만 세상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지라 내가 마주하고 있는 상대가 적인지 아군인지, 나란 사람도 정말 착한 놈인지 제정신인지조차 알 수 없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이 소중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회일수록 각자가 사유하고 있는 가치관들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심플해져야 정의롭게 볼 수 있는데, 이때의 ‘정의’는 사회적 약자의 방향에서 생각할 때에만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사회적 강자의 목소리는 이미 대변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의 문제는 그들 스스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투 운동의 본질은 남성,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행사가 있었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없는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없었던 저항을 지금이라도 공론화한다는 것. 그것이 미투의 본질이다.

민주주의를 다루고 있는 SF 만화 <은하영웅전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치의 부패란 정치가가 뇌물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부패일 뿐이다. 정치가가 뇌물을 받아도 이를 비판할 수 없는 상태를 정치의 부패라고 하는 것이다.” 내게 이 만화를 추천한 이는 최근의 상황을 비추어 대사를 이렇게 바꾸어 주었다. “정치의 부패란 정치가가 성추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부패일 뿐이다. 정치가가 성추행해도 이를 비판할 수 없는 상태를 정치의 부패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고 있는 현실은 이러하다. 일제 강점기 매국노의 후손이 떵떵거리며 사는 것을 격려하는 자들은 애초에 왕창 나쁜 놈들이니 빼고, 그래도 함께 사회를 깨끗하게 해보자며 목소리를 모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덕분에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로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을 정도의 민주화를 갖추게 되었다. 젊은 시절 민주화를 외치던 영웅들이 시간이 흘러 이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무르익은 나이와 일정 정도의 권력과 살아있는 영웅이라는 명예 등이다. 큰 슬픔에 빠진 그들은 오늘 위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련의 폭력 사건들에 대해 입을 다물라 한다.

한편에서는 국회를 혁신해야 한다며 청년 비례대표를 국회의원으로 모셔 놓았다. 그나마 몇 있지도 않은 청년 국회의원들은 권력의 테두리 밖에 있는 그들 세대의 문제의식을 간신히, 미약하게 목소리 낸다. 그러나 그들의 발언은 당 대표에 의해 대신 사과 된다. 어린애를 타이르는 듯하다. 포털 기사 댓글을 보면 미투 운동은 약자의 외침이 아니라 미천하고 혐오스러운 것들의 하극상인 듯하다.

아, 386세대 운동가들에게 청년은 그저 꽃병풍이었던 모양이다. 혁신이 필요하다며 자비로운 미소로 청년들을 홀려 기존의 공고한 틀에 청년들을 인자롭게 끼워주었던 그들이 정작 스스로 동일시하고 있는 어떤 이들의 위기 상황에서 몸소 실천해주시는 위계에 의한 억압! 그 폭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약자의 목소리가 짓밟아 지고 있는지 헤아릴 수 없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2차 가해라는 현실에서 이 순간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성폭력에 처해 있는 사람들이 어떤 용기를 가지고 문제를 발화할 수 있단 말인가. 부패한 사회이다.

반성 없는 이 사회에 희망이 없다며 오열하던 나는 오늘 아침 하나의 새로운 희망을 확인했다. CJB 청주방송 앞에서 열린 출근선전전 때 고 이재학 피디 유가족이 한 발언에서 발견한 언어이다. “먼저 떠난 동생이 알지도, 본적도 없는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앞서 계속 운동해 온 덕분에 억울한 동생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라며, “지금까지 자신이 관심 두지 않았던 사회 속 ‘연대’를 앞으론 자신도 함께하고 싶다”라고 하셨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소용이 있긴 한 걸까 싶은 내가 들고 있는 작은 피켓 한 장이, 피해자를 둘러싸 방패를 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같았다. 하나하나의 미약한 방패가 모여 문제를 비판할 수 있는 사회 상태를 만들어 주고 있었다. 활동가 생활 3년 만에 처음으로 ‘연대’가 가지고 있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작은 희망을 안고, 언제든 사회적 폭력 상황에 부닥칠 수 있는 약자들에게 나도 연대의 한마디를 던지며 마무리한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그 일은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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