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문화의 일반적 전파 루트는 북방에서 남방으로, 대륙에서 반도로, 섬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을 타는 ‘기마 민족 일본열도 정복설’도 그렇고 백제문화가 일본문화의 뿌리가 된 점도 그렇다.

그러나 문화는 간간이 일방통행을 거부한다. 신석기 유럽 농경문화의 예를 들면 페르시아에서 지중해 발칸반도를 거쳐 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의 문명은 ‘뭍에서 바다로’가 아니라 ‘바다에서 뭍으로’라는 반대 현상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문명은 오늘날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문화는 해안선이나 강을 따라 남진한다. 해안선이나 큰 강가에 빗살무늬토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것은 바로 이들이 살다 간 흔적이다. 해안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한 신석기인 들도 산 좋고 물 좋은 금수강산을 일찍이 알았던 모양이다.

북한의 웅기 서포 항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며 양양 오산리에 정박하였다가 울산 태화강변 바위에 그림을 새겨놓고 김해, 통영으로 내려오며 현해탄 바닷바람을 맞는다. 들쭉날쭉한 남해안 포구마다 삶의 조각을 떨구고 나니 문득 섬나라 제주도가 그리웠을 것이다. 검푸른 바다 위에 솟구친 한라산이 보고파 이곳에 들러 물경 1 만 년 전의 제주도 신석기 문화를 일구었으니 그곳이 다름 아닌 고산리 유적이다. 한라산이 화를 내며 용암을 배출할 때, 그 분노의 조각은 섬나라를 뒤덮었다.

6 천 년 전, 화산재가 쌓인 지층 아래선 이보다 먼저 인류행위가 있던 1 만 년 전의 질그릇이 출토되고 있다. 1만년이라고 하면 고고학계에서 ‘중석기’로 분류하는 시기다. ‘중석기’시대에 뜬 금 맞게도 신석기 유적이 출토되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섬이 단순히 내륙 문화의 기착지인줄 알았더니 오히려 내륙의 문화보다 더 오래된 경우도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섬의 문화가 내륙으로 온 것일까. 이 대목에서 고대 문화의 전파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우문우답에 봉착하게 된다. 고산리 유적은 충북과도 어떤 연관성이 있는 듯 하다. 단양 수양개 유적에서 나오는 화살촉, 슴베 찌르개(사냥도구의 일종)와 비슷한 유형의 흑요석 석기가 여기서 출토된다. 2만년 전, 단양 수양개 구석기 문화가 전남 화순, 대전을 거쳐 일본 큐슈로 갈 때 혹시 제주도는 중간 기착지가 아니었을까.

등대는 없었어도 태양과 별빛을 따라 고대 문화는 현해탄 검푸른 물결을 헤쳤던 것이다. 석기와 토기 문화가 한 박자 쉬어가면서 해양문화가 성숙되었던 탐라에는 육지의 ‘춘향전’에 버금가는 ‘배비장전’ 마당놀이가 무대에 올려지며 그 맥락을 이어갔다.

오늘날 내륙의 청주문화원, 전국문화원연합회충북지회 등 여러 문화단체들이 제주도를 찾아 ‘섬과 내륙의 문화’ 교류를 모색하는 것은 어쩌면 그 옛날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필연적 만남인지 모른다. 바다가 없는 충북과 물로 둘러싸인 제주도의 만남은 이질문화의 조우이자 동질문화의 확인작업이다. 내륙의 산맥은 바다를 향해 달리고 섬은 뭍을 그리워하매, 양자의 문화적 소통은 결국 뭍과 물의 조화다. 오늘날 교통의 발달로 제주도 해산물이 당일 청주로 도착하여 싱싱한 바다의 갯 내음을 전하면서 미식가의 입맛을 돋우는 것 또한 식생활 문화교류의 새로운 양상으로 풀이되니 충북과 제주도는 멀면서도 가까운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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