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그림자로 바라본 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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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의 그림자로 바라본 노후
  • 이재은
  • 승인 2020.06.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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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의 친정 엄마는 여전히 일을 하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제는 오롯이 당신 몫이 되어버린 밭에서 손을 놓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아니, 일하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기도 하다. 하루가 다르게 기력은 달리고 점점 굳어가는 관절을 펴는 것도 고역일 텐데, 몇 십 년 하던 습관 그대로 몸을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요즘 같이 햇볕이며 바람이 흔한 계절을 친정엄마가 허투루 보냈을 리 없다. 자연의 시계에 빤한 엄마는 당신의 몸이 언제 부려져야 하는지 잘 안다. 봄비 내리기가 무섭게 물러진 흙을 갈고 높아진 봄물 소리에 맞춰 씨앗을 뿌렸을 것이다. 끝 모르게 번져 나가는 어린 순을 솎거나 허정허정 솟아오르는 고추 줄기에 지지대를 박느라 숨이 가쁘셨겠지. 눈앞에서 하루해가 뜨고 등 뒤에서 노을이 펼쳐질 때까지 일했을 친정엄마를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 한편으로 답답함이 드리웠다. 왜 젊은 시절의 짐을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일까. 무엇이 의지할 자식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되었던 시절대로 살게끔 부추기는 것일까.

층층시하 어른들을 모시며 줄줄이 자식들을 건사하던 친정엄마의 젊은 시절을 나는 잊고 있었다. 엄마에게 하루는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모래와도 같았을 것이다. 인생에서 스르륵 흔적 없이 빠져 나가버린 시간을 팔순의 친정엄마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언젠가 시간과 싸우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늙어 있더라는 친정엄마의 말씀에서 덧없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이 가리키는 대로 앞만 보고 살아왔으니 느닷없이 찾아 온 당신의 노후를 챙길 겨를이 있었겠는가. 들은 대로 익히고 배운 대로 따라 하는 순종과 추종의 생활방식 세대였던 엄마는 당신의 노후에 어떤 기대를 걸어 보았을지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

팔십 평생 살아 온 인생에 남겨진 거라곤 고작 자식들이 전부라고 해도 궂은 일 없이 잘 살아 왔노라고 자부하는 친정 엄마다. 어렵고 힘들었던 삶의 고비 고비를 궂은일이라 기억하지 않고 아깝고 안타까운 시절로 그리워하신다.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 못지않게 지나간 순간을 치열하고 당당하게 살아 낸 나의 부모 세대, 보통의 노인들이라면 가지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모든 것을 순리로 받아들이며 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옳은 젊은 시절을 보낸 공경할만한 어른들이 아직은 많다.

배운 것은 없다지만 온갖 세상일을 겪은 노인들을 만나면 거대하고 대단해 보일 때가 있다. 수많은 모험담을 써 내려간 듯 보이는 거친 손으로 오랜 세월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모습이 그렇다. 고생을 습관처럼 여기고 매일 하는 일도 매번 처음의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엄두가 나지는 않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공경 받는 노인으로 살고 싶은가 보다. 흉내 낼 수 없는 경험을 내공으로 쌓은 노인이 사라진다는 것은 도서관이나 박물관이 사라지는 것처럼 과거의 가치와 의미를 배우기 위한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하지만 살면서 아무리 경험이 많은 노인일지라도 이 세상에서 소외된다면 서글픈 감정을 일으키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존재가 사회에 귀찮음으로 다가갔을 때 한없는 초라함을 느낄 테니까.

노인들이 살아온 길은 젊은 세대의 발자취로 이어진다. 행복하게 나이 들 권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꿈꿀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나라면 누구의 딸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순전히 나만을 위해, 오늘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 것 같다. 열심히 살아 봤자 어차피 불안함만 남은 내일, 버려질 노후만 기다릴 테니까. 영악함만 있고 자존심은 없는 젊음이 되지 않을까 겁도 난다. 현실을 보는 통찰과 미래를 예견하는 혜안이 없다면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친정엄마의 아릿한 젊은 시절은 당신에게 고지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편한 것, 쉬운 것 모르고 젊음을 밑천으로 살아 내기 위해 애쓰던 마음은 노후의 긴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정직하고 부지런한 마음이 담긴 그림자 속에서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는 세상의 열기를 피해 살아온 것이다. 자식들의 기댈 언덕이자 마르지 않는 곳간이 되고픈 친정엄마의 노후가 더 이상 먹먹하지만은 않다. 매 순간 최선이라고 믿었던 그 마음 그대로 완성해가는 친정엄마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나의 몫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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