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않겠습니다” 고 이재학 PD 100일 추모문화제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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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현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장은 "단호하게 투쟁해야만 진정으로 이재학 PD를 기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다솜 기자
조종현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장은 "단호하게 투쟁해야만 진정으로 이재학 PD를 기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다솜 기자

 

“너의 이름도 너의 목소리도, 너를 품에 안았던 순간들도. 덧없이 흩어져버리네. 강으로, 그 강으로….” - 김윤아 <강> 

누나는 추모곡을 직접 골랐다. 세월호 희생자 추모곡으로 유명해진 이 노래는 어느 프리랜서 PD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에도 쓰였다. 이재학 PD는 CJB청주방송에서 프리랜서로 14년을 일했다. 120~160만 원의 박봉을 받고서 밤낮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가 임금인상을 요구했더니 CJB청주방송은 ‘해고’로 답했다. 청주지방법원에서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걸었고, 패소했다. 2월 4일, 하얀 눈이 내리던 밤에 이재학 PD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추운 곳에서 혼자 기다리던 너의 눈물이었을까. 아파트 단지에 울려 퍼지던 가족들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갑자기 내리던 눈 몇 송이. 우리는 그날 밤을 평생 잊지 못하겠지.

오늘이 네가 멀리 떠난 지 벌써 100일이란다. 우리는 이 세상에 네가 없다는 게, 우리 곁에 없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데 말이야. 우리 가족의 이 슬픔과 눈물 그리고 그리움은 평생이겠지.”

누나 이슬기 씨가 울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이재학 PD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100일이 흐른 지금 가족들은 시계를 계속 되감아 본다. 동생이 떠난 그 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텐데…. 마이크는 이 PD의 동생에게로 넘어갔다. 

“지금 제가 가진 모든 걸 버려서, 제 영혼을 팔아서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돌아가고 싶습니다. (형이 죽기) 하루 전날인 2월 3일이라도…. 형이 죽음을 선택했던 그 한 시간 전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서) 형을 안아주고 싶습니다.”

동생 이대로 씨는 “형이 떠나고 가족들에게 벌어진 일들이 꿈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지독한 악몽일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 너무 슬픈 꿈을 꿨다고 형에게 말하는 게 동생 이대로 씨의 소원이다. 

이재학 PD의 누나 이슬기 씨(왼쪽)와 동생 이대로 씨(오른쪽) ⓒ 김다솜 기자
이재학 PD의 누나 이슬기 씨(왼쪽)와 동생 이대로 씨(오른쪽) ⓒ 김다솜 기자

 

죽음의 이유는 같았다  

13일(수) CJB청주방송 앞에서 이재학 PD 100일 추모 문화제가 열렸다. 사람들은 ‘고 이재학 PD를 잊지 않겠습니다’, ‘무늬만 프리랜서 이젠 그만!’이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또 다른 한 손에는 국화꽃 한 송이가 들렸다. 

“이재학 PD가 2011년부터 2017년까지 맡은 프로그램 평균 개수가 9.5개였습니다. 이걸 본 팀장급 PD는 말이 안 되는 기록이라는 말을 하더군요. 연출과 조연출을 막론하고 프로그램을 두 개 넘게 맡는 경우는 드물다는 겁니다. 회당 40만 원. 전 묻고 싶습니다. 왜 그토록 열심히 일했습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일했습니까.”

- 선지현 비정규직없는충북만들기운동본부 공동대표 

이재학 PD는 2004년 CJB청주방송에 조연출로 입사했다. 2010년에는 연출PD가 됐다. 출연진 섭외부터 시작해 마지막으로 프로그램이 나가기 전에 검수하는 일까지 정규직 PD와 다를 게 없었다. 근무형태도, 보고·지시 체계도 같았다. 단 하나, 다른 점이라면 그가 ‘프리랜서’라는 사실이다.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하는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 故 이한빛 PD의 유서 일부
대책위는 "이재학 PD처럼 '무늬만 프리랜서'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직군의 방송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억압된 노동 환경을 강요받는 이들이 함께 그를 추모하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 김다솜 기자
대책위는 "이재학 PD처럼 '무늬만 프리랜서'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했던 다양한 직군의 방송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억압된 노동 환경을 강요받는 이들이 함께 그를 추모하는 장을 만들고자 했다"고 전했다. ⓒ 김다솜 기자

 

이한빛 PD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내모는 삶이 버거워 입사 아홉 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재학 PD는 1년 6개월 동안 CJB청주방송과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다투면서 “이건 나를 위한 소송이 아니라 또 다른 프리랜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소송”이라고 말했다. 죽음의 이유는 두 사람 모두 같았다. 

“영원한 숙제를 남겨줬다”  

청주에서 사범대를 졸업한 김혜영 씨는 40년 만에 모교가 있는 이 지역으로 돌아왔다. 아들 이한빛 PD와 닮아있는 이의 추모 문화제에 오기 위해서다. 김 씨는 “다시는 제2의 이재학, 이한빛 PD가 나오지 않아야 한다”며 “그들이 우리에게 영원한 숙제를 남겨준 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재학 PD가 죽고 나서 사망사건 진상규명·책임자처벌·명예회복·비정규직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가 꾸려졌다. 그가 남긴 숙제는 몇 사람만의 몫이 아니었다. 60개의 단체가 대책위에 참여했다. 

이재학 PD를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놓은 국화꽃이 단상 위에 하나 둘씩 쌓여갔다. ⓒ 김다솜 기자
이재학 PD를 기리기 위해 시민들이 놓은 국화꽃이 단상 위에 하나 둘씩 쌓여갔다. ⓒ 김다솜 기자

 

 

대책위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다. 사망사건을 진상규명하고,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것이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회의와 조사를 번갈아 반복해왔다. 대책위는 CJB청주방송에 이행요구안을 제시할 계획이다. 

김혜영 대책위원장은 “이행요구안이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의 문서가 가지는 힘 때문이 아니라 이 자리에 함께해주는 여러분의 힘 덕분”이라며 “더 많은 힘을 모아 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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