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일

“내가 다시 말한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오 18:19~22)

인간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좋을 때 모든 것을 다 얻은 듯 싶다가도 잃을 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을 정도로 버려야만 하는, 부침(浮沈)이 심한 것이 우리네 삶일 것이다.

김상일씨(요셉·43)의 삶도 그런 것이어서 한 순간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절망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이제야 마음 속의 평화를 얻고 꽃동네 희망의집에서 새로운 삶을 열어가고 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들 주위에 있는 장애인들을 보며 마치 흉물을 대하듯 하지는 않았는지, 그들에게 따뜻한 미소로 손을 잡아주기보다는 눈살을 찌푸리며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그러나 우리는 모두 ‘미래의 장애인’이다. 어느 누가 불의의 사고로 신체적 장애을 겪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내일이 아니라 몇 분 후 당장이라도 재난 사고나 교통 사고 따위가 우리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장애인들은 단지 신체적 불편을 겪고 있을 뿐이다.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정작 큰 장애를 겪고 있는 것은 마음의 장애를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닐는지.김씨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김씨는 어린 시절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미군 부대를 다니면서 건축 하청업체를 꾸려가고 있었고, 어머니는 불고기 식당을 운영했다. 당시엔 2층집에서 살았는데 외아들이었던 김씨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그러나 문제의 발단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워낙 ‘손’이 컸던 어머니는 여러 가지 계주(契主)를 맡고 있었다. 그러다 세 번에 걸쳐 계가 깨지는 일이 생기게 됐다. 특히 세 번째 깨진 계는 규모가 워낙 커 어찌 손을 써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날 갑자기 들어온 차압. 집달리執達吏들은 2층집은 물론 김씨의 세발자전거까지 압류딱지를 붙여 놓았다. 그 일로 어머니는 교도소에 수감되는 신세가 됐다.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나게 된 것이었다.“집도 절도 없게 됐으니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됐지요. 동생과 저는 충남 서산에 있는 큰집으로 내려가고, 아버지는 행방불명, 어머니는 교도소행…… 서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았어요. 그렇지만 큰집도 어려운 형편이었죠. 4학년 여름방학 때 아버지의 소식을 알게 돼 춘천으로 올라오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벌써 다른 여자가 있더군요. 계모를 얻었는데, 그 집도 아들이 삼형제예요. 은근히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저도 성질이 모나서 저와 동갑내기인 계모의 막내녀석만 두들겨 팼죠. 서로간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아버지가 나서서 작은누나와 저, 그리고 동생을 방을 따로 얻어 내보내더군요. 우릴 쫓아내면서 그러시더군요. ‘난 안정을 원한다. 새롭게 가진 이 가정을 놓칠 순 없다.’ 아버지란 분이 자식들을 쫓아내며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이듬해 여름이었던가, 마음을 곱게 쓰지 않았던 탓인지 아버지가 춘천도립병원 공사를 맡았는데 장마철에 장대비가 억수로 내리더니 공사 현장이 몽땅 떠내려간 거예요. 우릴 내보낸 뒤로는 사업은 파산하고 가산은 탕진되고 아버지 하는 일마다 되는 게 없더군요.”부친은 결국 같이 살던 여자와 헤어져 김씨 남매에게로 왔다. 세 살 위였던 작은누나는 사춘기를 잘못 보내 이미 가출한 상태였다.“집안이고 뭐고가 없었죠. 어린 나이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결국 중학교 1학년 때 자퇴하고 화천에 있는 큰누나댁으로 갔어요. 매형이 이발사였는데, 나도 이발 기술을 배우면 호구지책은 되지 않을까 싶은 심정에서였죠. 그런데 작심삼일이라고, 영 그 기술이 제 체질에 맞지 않는 거예요. 그래 동네 청년들과 밖으로 나도니까 누나가 그러더군요. 네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고. 자동차 정비 기술을 배우고 싶다니까 춘천 화곡리에 있는 정비공장에 취직을 시켜주더군요. 그 곳에서 몇 달간 잔심부름도 하고 기술도 배우면서 꾸준히 생활했죠. 그런데 이번엔 그집 남자가 문제였어요. 원체 노름을 좋아하던 위인이었는데, 그 때문에 모든 것 다 날려버린 거예요. 그 가정도 풍비박산 났죠. 다시 춘천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삼진운수라는 버스회사에 정비사로 취직을 하게 됐죠. 그런데 평생을 두고 생각되는 건데, 저에겐 역마살이 있나 봐요. 한 군데 진드간히 붙어 있지를 못 하겠더군요.”김씨는 2급정비사 시험을 쳤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상심이 무척 컸다. 모든 게 하기 싫어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없는 듯도 보였다. 열일곱 되던 해 김씨는 화물차 조수로 따라다녔다. 그리고 열아홉 되던 1977년, 운전면허를 땄다. 기뻤다. 무슨 시험에 합격한다는 것이 김씨에게는 처음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기쁨은 더욱 컸다.어머니 이야기.김씨가 네 살 되던 해 교도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어머니는 가출을 했다. 그 이후 전혀 연락이 없어 지금까지 생사를 알지 못한다. 김씨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조차 없다. 그래서 원망이나 미련도 없다고 한다. 늘 비어 있던 어머니의 자리. 그러나 그 빈자리는 김씨에게 처음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린 조카를 거두어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키워주신 큰어머니가 되레 김씨에겐 어머니였다. 하여 김씨는 어머니로부터 비롯되는 애틋한 정이나 사랑의 감정이 없다. 그것이 충만하고 기쁜 모습의 사랑이든 아픈 모습의 사랑이든. 그런 감정이 메말라 있다는 것은 김씨에겐 큰 불행이었다. 어머니의 생사는 아직도 모르고 김씨 또한 알려 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이미 김씨가 네 살 되던 해 김씨의 가슴 속에서 지워져버렸던 것이기 때문이다.“스무 살에 군대가고, 그 곳에서 10.26사태도 겪고, 제대를 했어요. 그런데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제대를 하자마자 화물차 운전을 하게 됐지요. 월급도 제대로 안 나왔어요. 그러던 중 춘천 중앙시장에 있는 제주감귤상회라는 과일 도매상집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곳은 월급이 꽤 많았어요. 대신 일은 무척 고됐죠. 너무 바빠 잠을 자지도 못하고 운전 나가기가 일쑤였어요. 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쉴 때 쉬어야 하는데, 무리를 한 게 탈이었죠.”김씨가 과일도매상에 들어간 것은 1981년 8월 6일. 들어가고부터 김씨는 한 번도 잠을 자지 못했다. 일이 그만큼 바쁜 탓이었다. 5일 동안이나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한 채 8월 10일, 김씨는 대구에 내려갔다. 칠성시장서 물건을 싣고 오기 위해서였다. 천도복숭아를 싣고 상주, 문경을 지나 연풍 이화령휴게소까지 왔을 땐 거의 파김치가 다 됐다. 같이 동행한 사람이 김씨가 깜빡 깜빡 조는 모습을 보고 안돼보였던지 자기가 대신 운전대를 잡겠다고 했다. 충주까지만 자라고, 그러면 다시 내가 운전대 넘길 테니 잠시 눈을 붙이라는 거였다.“닷새 넘게 잠을 자지 못했던 탓에 운전대를 그에게 맡기자마자 잠이 마구 쏟아지더군요. 그리고 완전히 잠에 빠져버렸죠. 온몸에 밀려오는 피곤으로 잠이 들었는가 싶었는데 그분이 저를 깨우는 게 안쓰러웠던지 차는 벌써 충주를 지나 원주로 넘어가는 고갯길로 접어들고 있더군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급커브가 나왔어요. 언덕길을 올라가기 위해 속력을 내서 탄력을 받았던 트럭이 급커브를 제대로 꺾지 못했어요. 천길 낭떠러지. 어둠. 추락. 비명소리. 정신이 하나도 없었죠. 짐을 잔뜩 실었기 때문에 차체가 기우뚱했던 것이 사고의 주된 원인이었죠. 그분은 다행히 추락 직전 트럭에서 뛰어내렸는데, 저는 자고 있었던 탓에 트럭과 함께 낭떠러지로 곤두박칠치게 됐죠.”자신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나왔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칠흑같은 어둠. 자신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검붉은 선혈. 그러나 추락한 고통보다 김씨를 공포로 몰아넣는 것은 하체에 대한 감각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하체가 아예 없는 듯했다. 라이터를 켰다. 없어진 듯 감각이 없던 하체는 멀쩡했다. 동행하여 트럭을 운전하던 이가 추락한 트럭까지 내려와 김씨를 업고 비탈길을 올라갔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기지 않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큰길까지 올라오니 마침 지나가던 택시가 보였다. 그 택시로 김씨는 충주 제일병원으로 후송됐다.그 병원 의사가 김씨의 상태를 살피더니, “이 곳에선 안 된다”고 했다. 앰뷸런스도 없이 김씨는 개인 자가용에 의지해 서울까지 다시 실려갔다. 더구나 트럭이 무보험 차량이라 입원비를 내는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서울 한라병원에서 김씨의 기나긴 투병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새벽 1시에 사고가 났는데 점심 때가 다 돼서야 입원이 가능했어요. 작은누나에게 연락이 닿아 찾아왔더군요. 중환자실에서 수술을 하는데 병원비가 한정이 없는 거예요. 무보험 차량이라 일반환자였기에 더했죠. 차주는 돈을 안 대주고, 결국 제가 번 돈으로 병원비를 충당했어요. 누나가 살던 집 보증금을 빼서 마련한 돈을 합치고 해서 한 달간 그 곳에서 입원생활을 하게 됐습니다.”중환자실에서 한 달간 사경을 헤매던 김씨는 다행히 생명은 건져 일반병실로 옮겨졌다.“그때까지만 해도 전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어요. 일반 병실에서의 생활이 3개월이 지났는데 누나 안색이 눈에 띄게 달라진 거예요. 간병 오신 아버지는 매일처럼 술만 드시면서 한숨만 내쉬고. 왜 그럴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아버지께 화를 냈어요. 자식은 아파서 누워 있는데, 매일처럼 술만 드시냐? 그럴 바엔 차라리 오지마시라고 말이죠. 안 가시면 치료도 안 받고 밥도 안 먹겠다고 했죠. 그게 영영 이별이었어요. 그때 가신 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었으니까요. 그때 누나가 말하더군요. 하반신이 마비돼 앞으로 걸을 수 없을거라고. 너무 절망스러웠습니다. 죽고만 싶었죠. 걷지도 못하는 병신으로 평생을 살아갈 생각을 하니 앞날이 아득하더군요. 시간은 흘러 병원에 입원한 지도 5개월이 됐죠. 하루는 병원에서 제 보호자를 찾는 방송을 하더군요. 문득 짚이는 게 있었어요. 전날 누나가 그러더군요. ‘치료비로 1500만원이 나갔다. 이젠 네 돈도 내 돈도 없다. 이제 있는 것이라곤 만원짜리 몇 장 밖에 없구나.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간호사께 사달라고 해라.’ 그러면서 꼬깃꼬깃한 만원권 지폐 몇 장을 제 주머니에 넣더군요. 이제 절 간병하던 누나까지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해 병원 몰래 떠나간 거였죠. 원무과장이 올라오더니 보호자가 어디 있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보호자는 제가 더 찾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것으로 누나와의 인연도 끝이었죠.”욕창이 더욱 심해져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는 어찌하든 재활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버리지 않았었다. 그러나 욕창은 더욱 심해져만 갔고 급기야 사경을 헤매며 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게 됐다. 돈을 내지 못하는 환자였으므로 병원으로서도 난감한 입장이었다. 중환자실로 갔다가 일반병실로 갔다가, 이리저리 쫓겨다니기를 수차례. 병원에선 김씨에게 노골적으로 달갑잖은 시선을 보내왔다.김씨도 악만 남았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작은 꼬투리만 있어도 옆 병상의 환자와 싸우다 병실에서 쫓겨나기 일쑤였고 간호사와도 대거리를 해대며 싸웠다. 그러던 어느날 수간호사가 김씨를 찾아왔다. 가톨릭신자였던 그녀는 김씨에게 남다른 마음을 보여주었었다. 그녀가 물었다.“성당 다닌 적 있으세요?”김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2년간 다녔던 기억을 떠올렸다.“조금 다녔어요.”“그러면 됐어요.”수간호사는 병원 내에 있는 천주교 레지오 단원들을 모아 그를 찾아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김씨를 피했었다. 악밖에 남은 것이 없는 김씨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등 욕창이 심해 역겨운 악취 탓도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는 생각을 할 즈음 수간호사가 나타난 것이었다.“그분을 통해 병원 가톨릭 간호사들과 청년 레지오 단원들, 할머니 레지오 단원들과 말문을 트게 됐어요. 조금씩 대화를 나누다 보니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제 마음의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나도 모르는 결에 일어난 마음의 변화였죠.”처음엔 김씨가 그들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세수도 시켜주고 손톱 발톱도 깎아주고 목욕도 시켜주며 따뜻한 위로의 말과 신앙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그들을 보며 김씨는 가족도 버린 나를 이들이 지켜주고 있구나, 하는 감동을 받게 됐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종부성사까지 받았던 김씨는 기적적으로 몸이 회복돼갔다.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면서 몸도 따라 좋아진 듯싶었다.1983년이 됐다. 병원 측에선 김씨의 치료비를 받아내지 못 해 안달이었다. 김씨의 고백대로 그는 병원에서 ‘암적인 존재’였다. 원무과장이 찾아와 김씨에게 말했다.“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차주네 집에 갑시다. 그 안방에 누워 있어야 몇 푼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요.”그렇지 못할 바에야 아예 나가라는 이야기였다. 김씨는 그러겠노라했다. 그때까지 사고의 책임이 있는 차주는 김씨에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재판까지 진행했는데, 돈을 주겠다던 차주의 약속은 기한을 여섯 차례나 어기고 있었다. 다만 몇 푼이라도 받아내야겠다고 김씨는 생각했다. 차주의 집으로 가기 전 레지오 단원들이 찾아왔다. 그들이 김씨에게 말했다.“이제 며칠 안 남았네요.”“차주로부터 돈을 받아야 합니다.”“그 돈 꼭 받아야 되나요?”“방법이 없습니다.”“한가지 방법이 있어요.”“그게 뭐죠?”“꽃동네가 있습니다.”김씨는 단원들의 말이 처음에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을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던 레지오 단원들이 가톨릭 신자였듯 꽃동네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곳이었다. 또 죽으면 잘 묻어준다는 이야기도 김씨의 마음을 끌었다.1983년 11월 27일, 김씨는 그렇게 꽃동네에 입소했다. 처음 입소했을 때 오웅진 신부가 김씨가 탄 앰뷸런스까지 올라와 말했다.“고생 많았어요, 형제님. 이 곳에 잘 찾아왔어요.”김씨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고 심한 욕창 때문에 죽을 날만 기다리던 때였다. 병원을 나갈 때 담당자들이 자기네들끼리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저 사람 나가면 1주일을 넘기지 못 할 거야.”욕창이 전신으로 침투해 들어왔었다. 엉덩이를 갉아먹고, 허벅지를 갉아먹더니 무릎까지 썩어들어갔었다. 고열과 현기증으로 까무룩 혼절하는 때가 많았다. 그러나 꽃동네에 온 뒤 1주일밖에 살지 못 할것이라던 의사들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씨는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히려 욕창까지 거의 완치된 상태다. 허벅지살도 올랐고, 몸무게도 제법 많이 늘었다.“처음 꽃동네로 올 때 저보고 맹동으로 가라고 하더군요. 잘못 알아듣고 물었죠. 냉동? 날 냉동처리한다고? 죽으려고도 많이 했지만 막상 날 냉동처리한다는 말을 들으니 겁이 덜컥 나더군요.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면서 앰뷸런스에 실려가는데, 이 길이 마지막 길이구나, 생각하니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스물다섯의 젊은 나이로 이젠 나도 끝이구나 생각했던 첫 입소날. 그러나 김씨는 그 길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요, 안식을 찾아가는 길이요, 자신을 찾고 희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느끼게 된다고 술회한다.김씨가 간 곳은 음성꽃동네 본동이었다. 처음엔 꽃동네 생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본동엔 중환자들이 많았는데, 도무지 냄새를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제 몸에서 나는 욕창 썩은 냄새도 심한데, 그 곳은 더욱 심했죠. 병원에선 좋은 밥도 안 먹고 버티기 일쑤였는데 거친 밥을 먹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허기가 식욕이라고, 하루가 지나자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다음 날 맛있게 다 비웠죠. 최진숙 안드레아 수녀님이 그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계셨어요. 당시엔 수녀님이 되기 전이었으니 마리안나 자매님이었죠. 그 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저에게 와서 욕창을 치료해 주고 대변을 처리해주고 관장까지 해주셨죠. 병원에 있을 땐 느끼지 못했던 따뜻함이었죠. 병원에선 눈칫밥을 먹느라 늘 우울했는데, 이 곳에선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더군요.”4년이 지나 김씨에게는 친구가 생겼다. 뇌막염으로 머리를 다쳐 팔과 다리가 오그라드는 그런 남자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엔 수심이 없었다. 그는 늘 밝은 표정으로 지내는 이씨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게다가 이씨도 58년 개띠, 동갑내기였다. 그는 조금씩 꽃동네의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었다.“형제 자매 봉사자 분들로 하여 닫혔던 마음이 열렸다고 할 수 있죠. 그때부터 제 얼굴엔 웃음이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병원에선 언제 죽을까 하는 생각뿐이었고, 버럭버럭 소리나 지르기 일쑤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어요. 꽃동네에 들어온지 18년이나 됐으니 저도 꽤 ‘왕고참’ 축에 속하죠?”김씨는 요즘 희망의집에서 관리실 수녀님을 돕는다. 전화를 받고 컴퓨터로 서류를 작성하고 방송 안내도 맡고 있다. 레지오 단원 활동도 열심이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늘 가볍다. 작은 힘이지만, 꽃동네가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한 작은 빚갚음으로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다. 처음 꽃동네에 입소해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18년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런 형제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주눅들 것 없어요. 세월이 약입니다.”

김씨의 소원은 한 가지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고, 때가 돼 주님께서 부르시면 기쁘다 달려가는 것이다. 소소하지만 그에겐 소중하기 이를데 없는 꽃동네의 생활이 그에겐 행복이다. 그 행복한 마음으로 김씨는 기도를 올린다.

“꽃동네가족들에게 안식과 평화를 주소서. 저를 위한 기도를 듣지 마시고 이웃을 위한 기도에 응해주소서. 늘 주님의 품안에서 기쁜 마음으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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