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원작삽화 속 돈키호테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원작삽화 속 돈키호테

자, 모두 모이셨나요? 자유이용권 다들 받으셨죠? 지체할 시간이 없어요.

당장 떠날 준비가 된 분들은 여기모여 잠깐 작가님한테 인사좀 하고 가요. 예상치 않았던 일이라구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사는 제가 대표로 할게요. 같이 고개만 몇 번 끄덕여 주시면 됩니다.

세르반테스 작가님께

오늘로부터 415년 전 어느 날이었겠지요?

쉰여덟 해 동안 살아오신 날들의 흔적만큼이나 다사다난한 이야기로 가득 찬 ‘돈키호테’를 완고하고 드디어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셨겠지요. 다른 평범한 작가라면 ‘내 책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 두려워하고 걱정하여 긴장된 마음을 움켜잡느라 힘든 하루를 보냈겠지만, 이 책을 읽으며 제가 만난 저의 마음속 작가님께서는 앞으로 남은 역사에 이 책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혼자 상상하고는 배를 움켜잡고 낄낄거리며 웃으셨을 것 같아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본다면…

구겨 던진 원고가 가득한 책상 위를 여기저기 잉크가 묻어 거뭇거뭇 해진 손으로 쓰윽 밀어 손바닥만 한 공간을 만들어 그 위에 군데군데 이가 조금 나가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지만 원래의 기품은 잃지 않은 와인 잔에 싸구려 술을 가득 따라 홀짝홀짝 마시며 누가 보면 실성한 사람인 양 2초에 한 번씩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어쩌면 자신을 비난하고 무시했던 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그냥 받아들이며 살고 있던 부조리한 세상의 모습을 유쾌하고 재미있게 풍자한 책 속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계실 수도 있겠죠.

“쌤통이다! 이 친구야! 이것 좀 봐라! 이 세상아!”

작가님 덕에 2020년을 사는 저의 하루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저는 2020원더키드를 보고 자란 세대랍니다.

2020년에는 어렵지 않게 하늘을 나는 우주선을 타고 다니며, 쓰레기 가득한 지구를 대신할 행성을 내 주변 용기 많은 누군가가 찾아다닐 줄 알았어요.

KBS서 방영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KBS서 방영한 2020년 우주의 원더키디

하지만 2020년을 살고 있는 저는 우주선 대신 매일 밤 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손에 쥐고 500여 년 전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 돈키호테와 산초 옆에 딱 달라붙어서 그들이 겪는 말도 안 되는 모험에 입장권도 내지 않고 같이 즐기고 있답니다. 말을 못 하는 로시난테나 산초의 당나귀처럼 말이죠. 물론 저도 아무도 이해 못 할 웃음소리가 자꾸만 새어 나와 주변 사람들이 그 괴기함에 소름 돋아 할 때도 있어요.

근데 작가님.

매주 금요일마다 벽돌만 한 돈키호테 책이 위로 세우면 어른 키만큼 모이는 거 아세요?이렇게 돈키호테와 산초의 모험에 빠져든 사람이 저 말고도 여러 명이랍니다.

첫 등장부터 남다른 짠 내를 풍기는 돈키호테와 겪는 일마다 짠 내를 더 하는 우리 산초를 보며 흰 벽돌 열 개와 함께 모인 '벽돌 깨기 기사단'들의 모험심은 벽돌만큼 단단해지고 있어요. 주섬주섬 싸 들고 온 간식이 점심을 대신할 만큼 쌓이고, 모임이 끝나면 무슨 전리품 마냥 나눠주어 뭔가 대단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쥔 돈키호테와 산초의 마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니까요.

돈키호테 하면 풍차 이야기밖에 몰랐던 저는 요즘, 다른 책에서는 클라이맥스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인상적인 에피소드들이 이 책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때마다 펼쳐지는 것을 보며 왜 프랑스 문학평론가이자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돈키호테] 이후에 쓰인 소설은 [돈키호테]를 다시 쓴 것이나 그 일부를 쓴 것이다.”라고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어요.

‘자네 이야기를 읽으면 우울함이 웃음으로 바뀌고 웃음은 더 큰 웃음으로 바뀌게 하여, 어리석은 사람은 화를 내지 않고 신중한 사람은 그 기발한 착상에 감탄하고 심각한 사람은 경멸하지 않고 진중한 사람은 칭찬하도록 만드는 걸세.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증오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찬양하는 기사 소설의 잘못된 점을 무너뜨리는 데 주안점을 두게나. 여기까지만 달성해도 적잖은 성과가 아니겠는가.’ [돈키호테 서문 中]

작가님!

책의 서문에서 작가님이 바라셨던 바가 500년이나 지난 시대에 읽고 있는 저 같은 독자들에게 어김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계시지요?

벽돌만 한 두께의 책을 내셨지만 ‘해적판’이 출판되어 유통되는 바람에 정작 작가님은 경제적으로 큰 이익을 얻지 못하였다는 것을 읽고는 가장 짠 내 나는 주인공은 돈키호테도, 산초도 아닌 작가님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작품과 인생 모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일관된 모습으로 역사에 길이 남으셨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미라면 누구나 지쳐 마땅한 이 겨울방학에, 아이들을 재워 두고 늦은 밤 차가워진 손발을 비벼 대며 누구도 이해 못 할 키득키득 쉰 웃음소리(참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배를 움켜잡아도 새어 나오는)를 내뱉으며 책을 읽는 호강을 누리게 해 주신 작가님께 오늘 하루 다른 독자들을 대신해 소심한 감사 인사를 드려보고 싶었어요.

또한 앞으로 펼쳐질 책의 내용 속에 얼마나 더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펼쳐질지 넘기는 페이지마다 그 기대를 더 하고 있답니다.2권까지 다 읽고 나면 또 어떤 인사를 드리고 싶을지 저도 기대됩니다. 그때까지 입가에 웃음 머금고 기다리고 계셔 주세요.

야심한 밤, 잠 못 이루는 21세기 독자 드림.

자, 이제 다 되었어요. 작가님이 이 편지 읽으시는 동안 제 옆에 잘 붙어서 따라오시기만 하시면 된답니다. 

이제, 출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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