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대학교 앞 사회과학서점 '민사랑' 이야기

1990년대 초반 충북대학교 정문에 위치한 민사랑 모습
1990년대 초반 충북대학교 정문에 위치한 민사랑 모습

 

"아직도 있네요."

졸업한 지 이십년 만에 충북대학교 정문을 찾은 정지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 정문 좌측에 <민사랑>이라는 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서점이 내가 학교 다닐 때의 그 서점은 아니겠지?' 중얼거리며 서점을 향했다. "지우 아녀?" "저를 알아보세요, 사장님?" "그럼 예전의 단골손님을 몰라 볼까봐." 반갑게 맞이하는 서점 주인장의 얼굴은 해맑았다.

반백의 머리를 한 서점 주인은 이십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서점이 아직도 있네요?" "하하." 정지우가 2020년도에 발길을 한 서점 '민사랑'은 33년의 역사를 가진 서점이다. 1985년도 '충북서적(忠北書籍)'으로 시작한 것까지 따지면 만 35년이 되었다.

85년 당시 서원대학교 78학번 윤건호는 사회과학서점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충북대학교 코앞에 서점을 차렸다. 불과 7~8평에 불과했던 서점 안에는 중고 복사기가 있었고, 책뿐만 아니라 유인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서점을 가려면 농과대학 앞 논을 가로질러야 했다. 밤에 불 켜진 서점까지 걸으면 개구리 울음소리가 교향악처럼 들렸다.

 

"서점을 살려야 한다"

민사랑을 이야기하려면 충북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와 '무심천서점'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다.

'광주항쟁 1주기 행사'를 주도한 죄(?)로 청주교도소에 투옥되었던 김성구는 석방되자마자, 국민은행 골목에 '무심천서점'을 차렸다. 그는 후배들과 지인들에게 책을 외상으로 주기 일쑤였고, 심지어 수배자들에게 몇 번이나 용돈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책은 팔리지 않았다. 하루는 단 한 권 팔린 날도 있었다. <샘터>라는 잡지였다.

김성구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이주형(충북대 사회교육과 78학번)이었다. '무심천 서점'이 문을 닫을 위험에 빠지자, '무심천을 살려야 한다'는 공론이 있었고, 제비뽑기에 선정된 이가 바로 이주형이었다. 그게 1987년 봄이었다. 그해 4.19기념일은 '부활절'과 같은 날이었다. 당시 충북 청원군 오송에 살던 이주형은 전날 후배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집회준비에 밤을 꼬박 새웠다. 아침 일찍 집회하러 짐을 꾸리는데, 아내가 신음소리를 냈다. 진통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당황했다.

하지만 집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사회부터 모든 실무를 도맡은 그가 집회에 불참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에게 쭈뼛거리며 말했다. "여보 미안한데, 산부인과에 혼자 가야 되겠어" "..." 그날 아내는 산부인과에 가서 첫 딸을 낳았다.

이주형이 주도한 '4.19 기념행사'는 청주지역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서점 운영은 모르쇠가 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주인장에게 그 바통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지금의 주인인 최맹섭이다.

 

출근하자마자 "셔터 내려!"

서점 셔터를 올린 최맹섭은 귀가 가려웠다. 아니나 다를까 "합수부(합동수사본부)에서 나왔습니다. 셔터 내려!"하는 위압적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4~5명의 건장한 청년이 서 있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다. 안기부, 국군기무사령부, 충북도경찰청, 서부경찰서에서 합동으로 압수수색을 나온 것이다.

불청객들은 압수목록을 갖고 책들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냈다. <태백산맥>, <아리랑>, <전환시대의 논리>였다. 이들은 심지어 대학생들의 교양필수도서인 <철학에세이>, <역사란 무엇인가>까지 챙겼다.

그렇게 불청객들이 무전취서(無錢取書)해간 책은 20여 권이나 되었다. 주인장 최맹섭은 허탈했다. 금서를 압수해가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이라 놀랍지도 않았지만 출근하자마자 불청객들이 들이닥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맥을 놓고 있는데, EYC 선배 이주형이 들렀다. "압수수색 있었다며?" "예." 침울해 있는 주인장에게 이주형은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힘 내. 나는 수십 번 당했어."

1992년 서점 초기 민사랑 최맹섭 대표의 사진
1992년 서점 초기 민사랑 최맹섭 대표의 사진

 

민사랑 운영 30년차를 맞은 최맹섭은 서점을 홀로 지킨다. 서점이 잘나가던 1996~1998년에는 동생과 누나, 매제까지 나와 일을 도왔다. 하지만 인터넷서점 시대가 도래 하면서 매출액이 급감했다. 모든 비용은 최대한 줄여야 했다. 하다못해 그 흔한 자동 밴딩기가 없어 끈으로 일일이 책을 묶는 작업을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불편해 보이기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보인다.

"지난 몇 달, 몸은 고됐지만 서점 운영 30년 동안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최맹섭은 영락 없는 책장수다. 청주시가 '지역 서점 살리기 운동'의 일환으로 공공도서관과 작은도서관의 도서 납품을 민사랑에 맡기면서 최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EYC에서 활동하다 1990년 말에 민사랑을 인수한 최맹섭은 서점의 흥망성쇠를 모두 겪었다. 사회과학서점이 민주화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하던 1990년대 초는 물론이고, IMF 시절도 서점에서 보냈다. 대한민국 경제가 꽁꽁 얼어붙었던 IMF시대에 서점은 역설적으로 호황을 이루었다. 컴퓨터, 전문서적, 수험서가 불티나게 팔렸기 때문이다.

전문사회과학서점을 표방한 민사랑이 자기변신을 꾀한 것은 1996년도다. 건물이 신축되면서 임대료가 대폭 상승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 책만 팔아서는 보증금 1억에 월세 200만 원을 감당할 수 없어 25평으로 확장된 서점 한 켠에 수험서와 컴퓨터 등 실용도서를 비치했다. 이 시기, 아침 9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 30분까지 최맹섭의 발바닥에는 불이 났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가족 3명이 같이 일했지만 엉덩이를 의자에 붙일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호시절은 3년에 불과했다. 대형서점과 인터넷서점의 도래로 사회과학서점과 중소서점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한때 전국 대학가를 중심으로 우후죽순 번진 사회과학서점은 140개에 달했었다. 2020년 현재 사회과학서점은 서울대학교 앞의 '그날이 오면' 정도가 명맥을 유지한다.

1980년대의 전통적인 사회과학서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30년차를 맞이하는 최맹섭 체제의 민사랑은 여전히 인문사회과학서점이다. 출발할 때의 정신이 그랬고, 지금까지 지역에서의 역할이 그렇다. 1990년대 초까지 민주화운동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면, 현재는 보다 폭넓은 독자들의 '지식 충전소'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민사랑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비결은 뭘까? 첫째는 공공도서관 및 작은도서관 납품이다. 둘째는 꾸준하게 이용하는 장기 고객들이다.

특히 20~30년 동안 민사랑을 찾는 이들이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했고 현재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이 대표적이다. 환경운동가이자 농업정책전문가인 최상일은 시집을 포함한 문학책, 철학, 협동조합 등 여러 분야의 책을 섭렵하는 단골이다. 2020년 1월 현재 창작과비평사와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시집은 각각 438권과 536권에 이른다. 최상일은 그 책 모두 민사랑에서 구매했다.

젊은 손님으로는 박설희(31)가 있다. 그녀는 최근 '스피노자에서 여성과 민주주의'라는 석사학위논문을 썼는데,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1년에 수백 권의 책을 민사랑에서 구매한 열혈 독자다. 그는 1인 사업가인 최맹섭이 도서관 납품을 갈 때면 대신 카운터를 지켜준다. 납품을 돕는 김진국(62)씨도 있다. 민사랑을 30년째 지킨 최맹섭의 '선한 바이러스'가 세대를 초월해 이 두 사람에 닿은 게 아닐까.

 

"민사랑 딸래미"

충북 청주시 개신동 충북대학교 정문에 위치한 민사랑 내부 모습
충북 청주시 개신동 충북대학교 정문에 위치한 민사랑 내부 모습

 

충북청주경실련에 작년에 입사한 최민영(27세)은 '민사랑 딸래미'로 통한다. 성공회대를 졸업하고 로스쿨 공부에 전념하던 그녀가 충북청주경실련 문을 두드린 것은 오랜 고민의 결과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에 공익적 삶을 경험 해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충북청주경실련에 입사한 후 '청년위원회' 일을 담당하고 있는데, '청년 시사토론'과 '지자체 예산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최민영은 이 일을 하며 지역 의제에 관심이 많아졌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작게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는 자부심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기쁨이 보태졌다. '민사랑 딸래미'라는 칭호다. 경실련에 입사해 최근까지 여러 활동가들을 만날 때마다 "최 간사가 민사랑 최맹섭 딸이라며?"라는 인사를 받는다. 덕분에 아빠를 막연하게 '성실히 사는 사람'정도로만 생각했던 최민영에게, 최맹섭과 민사랑의 존재가 새롭게 다가왔다. 40~60대의 시민운동가와 회원들이 말끝마다 민사랑을 얘기하며, 아빠를 추켜세우기 때문이다. 얼마 전 만난 인권연대 '숨' 회원 류호찬은 "민사랑 때문에 인생 망쳤다"고 농담을 했다.

청주 지역 중년 활동가 중에 류호찬 같은 경험을 거치지 않은 이는 극히 드물다. 민사랑을 접하고 사회과학을 공부해 삶의 방향을 변경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들 대다수는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나침반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민주화운동 산실 역할을 한 민사랑이 오랫동안 기억되었으면 해요"라는 최민영의 말이 십분 공감되는 이유다. 여기에 민사랑이 앞으로도 시민들의 '지식충전소 역할을 해 우리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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