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진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 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40~42)

김세진씨(빠드리시오·49)의 꿈은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는 것을 순교라고 할 때, 김씨가 말하는 순교는 다소 낯선 의미이기도 하다. 그가 견지하고 있는 순교는 봉사활동을 하면서 맞이하게 되는 죽음이다. 교회라는 거창한 조직을 위해서가 아니고, 믿음이라는 지고한 가치를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하나의 자양분이 되고자 살다 가는 성실한 삶, 그것을 그는 자신이 지켜내야 할 순교라고 믿고 있다.이름없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는 것도 그에겐 순교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순교란,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한 삶을 살다 타인을 위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인 게다. 그런 순교자가 되는 것은 선택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그는 생각한다. 선택된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봉사의 기쁨과 환희, 그리고 봉사의 삶을 살다 가는 것, 김씨는 늘 그런 죽음을 꿈꾸고 있다. 거창하기 이를데 없는 순교관을 갖고 있는 김씨는 그러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대구상고를 거쳐 영남대 상대 경영학과 70학번으로 졸업한 김씨는 경제개발의 주역세대였다. 1977년 현대중공업 계열사인 한국 프렌지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경리와 회계, 자금을 담당했다. 그는 샐러리맨의 전형이었다. 지각하면 안 되고, 자기 일은 철저하게 마무리 짓고, 퇴근은 남들보다 늦게 하는 모범적인 샐러리맨이 그의 삶의 모습이었다.1983년 서른한 살 때 그는 결혼을 했다. 직장 상사의 소개로 만난 여자는 미장원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80번도 넘게 선을 봤지요. 고르다고르다보면 못한 사람을 고르게 되더군요. 사람의 운명일까, 혹은 섭리일까, 왜 그 사람과 결혼하게 됐을까, 지금 생각해 봐도 답이 안 나오는 질문이에요. 여든 번을 넘게 선을 보면서 다른 사람들도 많았는데, 유독 그 여자와 결혼하게 됐을까, 참 막막한 질문이죠. 자녀 욕심은 있었는데 자녀는 없었어요. 혹시 모르죠. 자식들이 있었다면 그 여자와 갈라서는 일이 없었을지도. 자식이 어떤 ‘연결고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그가 아내와 이혼한 것은 1986년 4월.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신혼맛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그들 부부는 헤어졌다.“성격 차이였다고 해야겠지요. 그 여자는 시가 쪽을 배제하는 생활을 했지요.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건강한 삶에 대한 욕망의 결여, 가족 유대에 대한 거부, 게다가 돈에 대한 집착이 강했어요. 손바닥도 맞부딪치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이혼까지 간 데에는 제 탓도 있기야 했지요. 전 유교적 집안에서 자라나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죠. 그 여자 얼굴 하난 참 예뻤어요.”1986년 이혼 후 그는 서울로 직장을 옮겼다. 수산물을 취급하는 유통회사였다. 직장을 옮기면서 답답했던 마음도 정리했다. 진급도 했다.“꽤 좋은 직장이었죠. 혼자 생활하는 것을 보고 주위에선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았어요. 만나 본 사람도 있지요. 처녀도 만나고 과부도 만나고, 그런데 썩 마음이 내키지 않더군요. 아마도 결혼의 실패에 대한 부담감이 너무 컸던 게지요. 하긴 혼자 생활하는 습관이 시골에서 대구로 나왔던 고등학교 때부터였으니까 익숙하기도 했을 테지요. 77년 직장을 잡고서부터는 울산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까, 어찌보면 혼자 생활하는 게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보다 더 편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그러나 김씨의 기대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대표이사 성격이 모가 나 직원들을 거의 ‘의무적’으로 닥달하는 위인이었다. 인격 모독까지 해가며 다그치는 사장을 보면서 그는 그만두겠다는 결심도 여러 번 했지만 4년간을 버텼다.“자금, 회계, 경리 등 중추적 역할을 제가 담당했기 때문에 그 직장이라는 곳을 들어가는 것보다 나오는 것이 더 힘들게 되더군요. 게다가 그런 역할 탓으로 회사 직원들로부터 ‘사장 심복’이라는 오명까지 얻어가면서 말이죠. 정리할 것 다 정리해주고 나올 수 있었죠.”김씨가 다음으로 1990년 2월에 얻은 직장은 설비, 소방, 상하수도 등을 맡는 ‘신세계 엔지니어링’이었다. 그 회사에서 김씨는 자신의 인생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 했다. 그는 그 곳에서 5년간 근무했다. 그런데 1995년 그 회사가 부도를 맞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장이 폐암 선고까지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엉뚱한 데서 비롯됐다. 고의성 있는 부도라며 검찰의 수사가 시작된 것이었다.“부도가 나기 전에 제가 끌어온 사채(私債)가 있었어요. 막내누나 땅을 회사 담보로 제공해 주었는데, 회사 부도로 몽땅 날릴 위기였죠. 부도가 나던 날 회사 상무가 내게 말하더군요. 제가 담보 제공한 땅의 반이라도 건지라고. 전 그랬어요. 직원들 밀린 월급부터 주자고. 이 돈을 내가 건드릴 수는 없다고. 그러자 상무가 그러더군요. 직원 월급은 공사현장 미수금으로 해결하겠다. 당신 피해가 너무 크니 조금 줄여야만 하지 않겠느냐. 해서 2억4500만원 담보 제공한 것 중에 1억 2000만원을 받게 됐어요. 그것이 문제가 돼 채권단으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96년 1월 구속됐지요. 3개월 동안 구치소 생활을 했어요. 처음 들어간 그 곳, 참 낯설더군요.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오게 됐나, 삶이 참 허망하기도 하구요.”김씨는 1심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김씨는 항소했다. 다행히 대법에서는 무죄가 확정됐다. 1996년 한 해를 김씨는 그렇게 허비했다. 이듬해 그는 주위 사람의 추천으로 다이어트 회사에 취직했다. 그 회사는 사장이 재기하는 과정에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때 또 한 방을 맞게 됐다. IMF, 그 한파로 회사는 곧바로 부도가 났다.참 얄궂은 일이었다. 번듯한 대학까지 나와 번듯한 회사까지 다녔는데, 한 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자 나자빠지는 회사만 골라 취직하게 되고, 업무가 회계, 자금 담당이라 뒤치다꺼리로 정신만 빠져나가게 되는 꼴이었다. 안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처럼 그는 심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사회로부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도피하는 심정으로 찾아든 곳이 가평꽃동네였다.“98년 3월 2일부터 12일까지 열흘간 가평꽃동네에 있었어요. 그 곳에서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가는 꽃동네가족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지요. 사실 꽃동네와의 인연은 그 이전에 있었어요. 88년에 ‘꽃동네회지’에 실린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꽃동네후원회원이 됐어요. 그리고 그런 이유로 90년 2월 첫영성체까지 받게 됐죠. 94년에는 여름휴가를 받아 음성꽃동네 구원의집의 곽 수사님을 찾아가 중환자실에서 봉사활동을 했지요. 3박4일이었는데, 꽤 힘들더군요. 95년엔 구원의집에서 1주일 동안, 96년은 재판 받느라 못 왔고, 97년엔 가평에도 꽃동네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평꽃동네로 오게 됐지요. 평화의집 중환자실에서 1주일 동안 있었는데, 시신 3구를 처음으로 염해봤어요. 알코올 소독하고, 천을 감고, 시신에 있는 모든 구멍을 막고…… 어떤 비대한 분의 시신에서는 진물이 흘러나와 천을 찢고 다시 염을 하기도 했죠. 그러니 그 전에도 꽃동네와는 인연이 꽤 있었던 셈이죠.”열흘간 봉사활동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회의 일을 그냥 피할 것만도 아니었다.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니고 사업을 그릇되게 이끈 것도 아닌데, 마치 죄인처럼 숨어 있는 자신의 꼴이 한심스러웠다. 김씨는 12억원 부도를 맞은 회사를 다시 찾아가 뒷정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5월 2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평꽃동네로 돌아왔다. 희망의집에서 5개월, 환희의집 주방에서 20일, 환희의집 2층에서 1개월, 사랑의집 2층에서 2개월 기타 등등……시간이 훌쩍 흘러버려 가평 온 지 18개월이 지났다. 그때 한 친구의 요청이 찾아들었다. 자신이 빌딩을 사둔 게 있는데 관리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빌딩은 IMF로 부동산 경기가 하락됐을 때 경매를 받아 산 것이었다.“그런데 참 못할 일이더군요. 경매를 통해서 산 것이니 입주자들과의 마찰이 오죽 심하겠어요. 따지고보면 그들 또한 피해자라 할 수 있을 테니까요.”그는 이번 기회에 사회생활을 정리하자고 결심했다. 2000년 9월 17일 그는 다시 가평꽃동네로 들어왔다. 그리고 환희의집 관리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정신병동인 환희의집은 정신병력자들은 물론 알코올 중독자, 정신박약자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가평꽃동네에서 김씨는 윤종철이라는 가족과 친하게 지냈다. 종철씨는 나이 서른두 살로, 머리만 살아 있는 친구였다. 전신불수라는 이야기다.“생각은 나와 다를 게 없는데 저런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참 안타까웠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다가 사고가 나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눈물이 납디다. 친하게 지냈어요. 많은 이야기도 나눴고. 먹을거리를 숨겨 두었다가 그 친구에게 가져다 주기도 하고 고기 반찬도 챙겨 먹이고 옷가지도 입혀주고 밖으로 산책도 많이 데리고 나왔죠. 스스로 움직이지 못 해 쉬는 날이면 가서 늘 데리고 나오곤 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업무가 너무 바쁜 탓도 있지만, 한 사람만 너무 편애한다 싶은 자책감도 들었기 때문이죠. 다른 가족들의 불만도 생각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는 업무가 참 바쁘다. 그런 바쁜 일상이 김씨는 좋다. 전화를 체크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업무일지를 작성하고 환희의 집 온갖 일들을 총괄 정리하는 책임이 그에게 있다. 시설장 수사님과 가족들간의 중간 허리 역할도 그의 몫이다. 간식이 나오면 층별로 배분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사회에 있다 처음 꽃동네가족들과 접하면서 그는 이런 곳도 있구나, 인간 삶이 이렇구나, 이런 어려운 곳에 내 몸이 쓰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 열망으로 오랜 기간 봉사를 하다보니 그에게 꽃동네의 생활은 마치 자신의 삶 속에 내정돼 있었던 것으로 다가오게 됐다. 하면서 늘 느낀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면 꽃동네는 없었을 것이라고. 그에겐 작은 소망이 있다. 2003년 9월 17일까지 꽃동네에 꼭 있겠다는 각오가 그것이다. 그날이 꼭 3년째 되는 날이다. 그 다음은 그때가서 다시 생각해 보잔다. 하면서 기도를 드린다.

‘제 삶을 주님께 맡겼으니 주님의 뜻대로 써주소서.’

더 큰 욕심은 주님의 나라로 가고 싶다는 것이다. 영혼의 구원을 받고 싶지만 그분만이 아시는 일, 다만 세상살이의 토막토막에서 가끔씩 하늘을 쳐다보며 주님의 뜻대로 살고 있는지 자신의 지난 일을 반추하며 속죄하는 것이 그의 몫. 그는 꽃동네에 대해서 말한다. 꽃동네는 생기지 말아야 될 곳이며 없어져야 될 곳이라고.

“꽃동네가 생긴 이유는 사회와 가족이 그들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소외 돼버린 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들을 따뜻하게 맞는 꽃동네가 있는 거죠. 사회와 가족이 그들을 제 품으로 안을 수 있다면 꽃동네는 없어도 되는 셈이죠. 바꾸어 말해 꽃동네가 없어도 될 사회, 그런 사회가 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꽃동네가 없어져야 한다는 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게 인간사이니, 누군가 해야 할 수고를 꽃동네가 대신 맡았다 할 수 있겠죠. 사랑과 행복이 풍만한 사회라면 꽃동네가 생기겠습니까? 그러니까 꽃동네는 부재(不在)한 유토피아를 대신하는 실존(實存)의 대체용 유토피아라고나 할까요?  진정한 유토피아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 모두가 책임지는, 소외되고 얻어먹을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이들을 한 사람씩 책임지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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