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를 왜 교육도시라 부르는가. 그냥 하기 좋은 말인가. 아니면 근대화 과정에서 남달리 교육인프라가 강화된 것일까. 그건 그렇지 않다. 청주가 교육도시로 자리매김 한 것은 자그만치 1천3백여 년 전의 일이다.

통일신라 시대 청주는 오소경(五小京) 중의 하나인 서원경(西原京)이었다. 오소경에는 왕경(경주)보다 작기는 하나 닮은꼴의 도시 규모를 가졌고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을 두었다. 그 첫 번째의 증거가 청주백화점 뒤뜰에 우뚝 솟아있는 구리돛대 용두사지 철당간 명문이다.

고려 광종 13년(962), 청주의 호족 김예종(金芮宗)의 발원으로 시작한 이 불사는 사촌형인 김희일(金希一)에 의해 마무리되었다.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 철당간에는 교육도시 청주의 뿌리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 30단의 철통 중 10단이 없어지고 20단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아래에서 세 번째 철통에는 학원경(學院卿), 학원낭중(學院郎中)이라는 교육 책임자의 직책이 보인다. 오늘날로 치면 교육감, 교육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두 번째 이유는 조선조 대학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이 청주목사를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향약의 교과서 격인 서원향약(西原鄕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이 선생은 선조 4년(1571), 청주목사로 부임하여 약 1년 간 집무했는데 이때 중국의 여씨향약(呂氏鄕約)을 토대로 서원향약을 만들었다.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을 4대 덕목으로 한 서원향약은 이황의 예안향약(禮安鄕約)과 더불어 우리나라 향약의 양대산맥이 되었다.

향약이란 농경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로 묶으면서 그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규범을 정한 것으로 교육적으로 보면 하나의 덕육(德育)인 셈이다. 우리나라 향약의 출발점이 바로 청주에 있다는 것은 조선조에서도 교육도시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다. 지방인재를 양성하던 청주향교는 삼남 제일의 향교로 세종 26년(1444), 세종이 안질 치료차 초정에 행차할 적에 서적을 하사하였고 세조는 청주향교 문묘에 친히 제향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조에는 우리나라의 학파가 경기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와 영남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嶺南學派)로 대별되는데 기호학파의 중심인물인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등이 직, 간접적으로 청주지역과 인연을 맺고 있다. 용정동 선도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신항서원(莘巷書院)은 16세기, 서원이 전성기를 이룰 때 삼남에서 으뜸가는 서원이었다. 선조 3년(1570), 조강(趙綱), 이득윤(李得胤), 변경수(卞景壽) 등이 세운 이 서원은 경연(慶延), 박훈(朴薰), 김정(金淨), 송인수(宋麟壽) 등 네 분을 모셨다.

그후 한충(韓忠), 송상현(宋象賢), 이득윤(李得胤), 이이(李珥), 이색(李穡)을 추향, 모두 아홉 분을 제향하고 있다. 아홉 분 모두가 우리나라 정계, 학계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네 번째로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은 창조정신의 집결체이고 교육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문화유산이다. 최근에 청주가 교육도시 특구에서 탈락한 것은 충격적이다. 1천3백여년을 교육도시로 성장해온 청주의 역사성을 숫제 무시하는 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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