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년 청주여고 재학중 친일교사 퇴진운동'강동정치학원' 출신 남로당 여성동맹 활동

2001년 6월 14일자 모일간신문에 ‘53년만에 다시 북으로’라는 제목의 박스기사가 실렸다. 광복 직후인 지난 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가했던 유금수씨(여·78 음성군 삼성면 용대리)와 신창균씨(96·조국통일범민족연합회 고문)에 대한 보도였다. 당시 두 사람은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공동선언 발표 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토론회’에 남측 일행으로 참석했고 취재기자의 눈에 띄게 됐던 것.

48년 당시 신씨는 김구 선생과 함께 한국독립당 대표 8명 중 한 사람으로 평양을 방문했고, 유씨는 남조선노동당 계열의 여성동맹 대표로 연석회의에 참석했다. 남로당 활동이 금지된 상황에서 유씨는 천신만고 끝에 38선을 넘어 비공식적으로 연석회의에 참가한 것이었다. 당시 유씨는 21세의 꽃다운 처녀였고 청주여고 졸업후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월북한 것이었다.

이후 남한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청주교도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충북 여성동맹 책임자로 임명받아 조직활동을 주도하다 국군의 청주탈환과 함께 ‘빨치산’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빨치산 색출작전으로 청원 남일면에서 체포됐으나 천신만고끝에 탈출해 고향 괴산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음성군 대소면 용대리로 시집와 2남2녀의 자식을 키우며 50년을 살아왔다.

90년대초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남북 이념대립의 긴장완화와 통일운동 확대에 따라 유씨는 비전향 장기수들과 만나게 됐고 다시금 ‘여성 혁명가의 회한을 되살리게 됐다. 해방-분단- 전쟁-대립-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의 질곡을 온 몸에 아로새긴 유씨. 취재진은 통일시대충북연대 박종희 운영위원장의 안내를 받아 지난 연말 어렵사리 유씨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남편과 자식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한 여성 혁명가의 절절한 ‘인생사’는 3시간동안 도도한 강물로 넘쳐났다. 남북통일의 기운이 새해에 더욱 넘쳐날 것을 기원하며 50여년간 ‘창살없는 장기수’로 살아온 ‘노혁명가의 애가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1928년 유씨는 괴산읍내의 천석군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9살 되던 해, 괴산에 대홍수가 발생했고 유씨 집은 삽시간에 물에 잠겼다. 다섯 식구 가운데 유씨와 아버지만이 천우신조로 살아남았고 어머니와 두 동생은 이승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 가까스로 헤엄쳐 피신한 아버지가 넋을 잃고 다시 물에 빠져 죽을까 싶었는데, 내가 아버지 다리를 붙잡고 우는 바람에 마음을 돌리셨다는 거여. 그래서 할아버지가 ‘지 애비를 살려낸 자식’이라며 나를 귀여워하시고 공부도 남자 사촌들과 똑같이 시켜줬어”

할아버지는 남자 사촌과 유씨등 4명의 손자 손녀에게 아예 독선생(과외교사)을 한명 붙여 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유씨만이 청주여고에 합격했고 사촌들은 청주지역 고교진학에 실패했다. 할아버지는 엄마도 없는 가여운 손녀의 손을 이끌고 청주여고 기숙사로 직접 안내해 주셨다. 품안의 금지옥엽처럼 여겼던 손녀는 청주에서 새로운 세상에 눈뜨기 시작했고 진보적인 교사들을 통해 민족의식을 키우게 됐다.

“일제시대에 여고에 입학했는데 박정운, 노봉우 선생님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큰 가르침을 주셨어. 그런데 5학년 여름방학때 해방이 된 거여, 당시 고보 5학년이면 인텔리 지식층이고 민족의 앞날에 대해 많은 얘기들을 나눴지. 그때 서울지역 대학생들 가운데 지역에 내려와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학습지도를 하는 그룹이 있었어. 당시 고려대 대학생이었던 이중재씨(전 국회의원)도 거기서 만나게 됐지. 대학생들 영향으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3학년말에 친일행적이 뚜렷한 교사들의 퇴진을 요구하며 등교거부 운동을 벌였지”

청주여고 퇴학생, 이화여고서 받아줘
청주여고에서 시작된 친일교사 퇴진운동은 다른 학교로 전파되는등 파장이 적지 않았다. 결국 학교측은 졸업 3개월을 앞둔 유씨를 전격적으로 퇴학시켰다. 유씨는 다시 할아버지에 이끌려 서울로 향했고 몇몇 학교에서 퇴짜를 맞았으나 다행스럽게 이화여고 신봉조 교장이 입학을 허용해 그곳에서 졸업장을 받게 됐다.

“딴데서는 다 안된다고 했는데, 이화여고에서 신봉조 선생님이 등교거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듣더니 ‘학생들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벌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일로 학생의 앞날을 가로막는 것은 학교가 할 일이 아니다’며 받아 주신 거여. 낯설고 물설은 서울에서 3개월을 다니고 고향 괴산으로 내려왔지. 그때 외지 유학생을 중심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학습토론을 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 참여하면서 세상 공부를 제대로 하기 시작한 거여”

여고를 졸업한 유씨가 철저한 사회주의 혁명가로 학습받은 곳은 바로 북한의 강동정치학원이었다. 유씨는 48년 남노당 여성동맹 조직을 통해 월북한 뒤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하게 됐다. 강동정치학원은 북이 설립한 정치군사학교로 남한에서 올라온 교수, 의사 등 전문직 지식인들이 고향, 나이, 이름조차 서로 가린채 3개월간 집중적인 정치학습을 받았다. 이곳에서 학습을 끝낸 유씨는 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참석하게 된 것.

 “강동정치학원에서 함께 학습한 여성이 6명인데, 모두 평양 연석회의에 참관하게 됐어. 연석회의는 모란봉 극장에서 열렸는데 연단에 김구, 박헌영, 홍명희, 김규식, 조소앙 선생이 앉아계신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그때 들은 얘기로는 첫 대면한 김일성 주석이 한복을 입고 큰 절을 하자 김구 선생이 이를 만류했는데, 김 주석이 ‘조국 해방투쟁의 선배님이신데 당연히 절을 올려야 한다’고 얘길하니까, 거기에 크게 감복하셨다는 거여”

전향거부하고 감옥택한 강골(?)
특히 남한측 참가자들을 위해 마련한 공연행사 첫머리에 독립운동가 유자녀들에 대한 교육기관인 혁명가 유가족학원의 학생들이 몰려나와 인사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는 것. “잘 차려입은 유가족 학교 대표 학생이 조국해방을 위해 일해온 부모에 대한 감사인사와 부모를 대신해 자신들을 돌봐주는 국가에 대한 고마움을 얘기할 때 남측 사람들 여럿이 울음을 터트렸어. 그때 남쪽에서는 친일파 출신들이 득세하고 독립운동가들이 괄세받는 처지 아니였나? 서러움과 억울함 때문에 그냥 눈물이 났던 거지”

남북 연석회의가 끝나고 유씨는 다시 월남해 남로당 충북조직의 여성동맹 활동가로 파견됐다. 경찰의 눈을 피해 철저한 점조직으로 움직였지만 남로당 일제 검거령의 그물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좌익활동 혐의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됐고 공안당국에서는 ‘남로당 탈당계를 쓰고 전향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관선 변호인까지 탈당계를 쓰도록 회유했지만 끝까지 거부했다는 것.

“청주교도소에 있을 때 한번은 이른 아침부터 검사가 순시를 온다며 수선을 피웠어. 방정리하고 복도 청소하고 기다리니까, 박검사란 분이 나타났어. 죽 지나가다 우리 방앞에 서시더니 ‘거기가 유금수인가, 끝끝내 싸워 볼 작정인가?’하고 말을 건네더군, 난, 탈당계를 안쓰고 버티니까, 저러나보다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박검사도 우리 조직원이었어. 결국 그 분 덕분에 징역형을 받지 않고 집행유예로 풀려났지. 젊은 여성 조직원이 전향을 거부하고 끝까지 버티니까, 격려차 일부러 방문한 거였어”

한국전쟁 발발, 서대문형무소서 풀려나
생애 첫 감옥살이를 마치고 교도소를 나서자 작은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씨를 고향 괴산으로 데려오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을 받고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의 꿈에 사로잡힌 유씨는 한가하게 고향으로 끌려갈리 만무했다. 작은 아버지를 따돌린 유씨는 서울로 향했고 중앙연맹에서 지방과 중앙을 잇는 오르그(조직관리자)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때 지방조직은 상당부분 경찰에 검거돼 와해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활동은 극도의 보안속에 이뤄졌고 조직원간의 접선도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49년 유씨는 경찰에 또다시 검거됐고 수도경찰청으로 끌려갔다. 이곳에서 유씨는 여고시절 등교거부 운동을 지도했던 대학생 이중재씨를 만나게 된다. 이씨는 경찰청 형사주임으로 좌익사범 수사의 핵심인물이었다. 한때 사상적 교사역할을 했던 이씨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운명적으로 해후한 것이다.

“언제 이씨가 프로파(전향자)가 됐는지는 나도 잘 몰라. 그런데 하필 좌익들 잡아들이는 경찰 간부로 있다가 나와 마주쳤으니 그 사람도 무척 놀랐을 거여. 나중에 나만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더구만, ‘어찌된 일이냐’고 묻길래 내가 오히려 따졌지. ‘열렬히 투쟁하자고 가르쳐주신 분이 정말 어찌된 일이냐’고 그러니까 ‘너희한텐 할 말이 없다. 난 대한민국을 위해 충성을 다할테니 너는 네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고 하더구만. 그뒤로 나이 오십이 넘어서 우연히 또 만난 적이 있지, 참 그 양반과 인연은 질기기도 하지”

이중재씨는 정계에 투신해 야당의 거물 김대중 계보로 활동하다 5공화국 때는 민한당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신민당의 중진의원으로 활동하다 87년 야권 단일화운동에 나섰고 김영삼계로 정치적 족보를 옮기기도 했다. 말년에는 민자당을 거쳐 한나라당 상임고문을 맡기도 했다. 유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현란한 정치이력의 배경에는 사상 전향의 뿌리가 감춰져 있었던 셈이다.

청주 빨치산 활동, 도청습격사건 발생
유씨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두 번째 감옥생활을 시작했고 이듬해인 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되자 인민군들에 의해 풀려나게 됐다. 퇴각하기에 급급한 국군과 경찰은 동대문형무소에서는 좌익 사상범들을 사살하거나 연행했으나 서대문형무소에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발발과 함께 지하에 있던 남로당 조직은 다시 재건됐고 유씨는 충북 여성동맹 책임자로 발령받게 된다. 활동이 자유로와진 유씨는 수년만에 괴산에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유씨가 누린 자유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50년 9월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됐고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진 인민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청주에 있던 유씨도 조직의 일부 간부들과 함께 상당산성으로 피신하게 됐다. 한겨울 추위속에 산사람 ‘파르티잔(빨치산)’으로 변신한 것이다.

51년 4월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조직과 함께 보은군 마로면 갈평을 근거지로 삼아 청주 습격사건을 벌이게 된다. 남부군과 지역출신 빨치산 100여명이 청주를 급습해 도청, 청주경찰서, 청주형무소 등 주요 기관을 일시에 점령한 뒤 수감중이던 좌익계 죄수들을 풀어내 속리산으로 철수했다. 한국전쟁 기간중 빨치산이 도청 소재지를 공격, 한때나마 점거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청상과부로 신분위장, 음성 대소면 정착
하지만 유씨의 빨치산 활동은 그 해 여름을 넘기지 못했다. “아마 6월쯤 됐을 꺼여, 수십명이 남일면 마을에 내려와 주섬주섬 아침밥을 먹는데 경찰이 들이닥친 거여. 뿔뿔이 도망치고 난리가 났는데, 난 얼른 치마저고리를 갈아입고 변소칸으로 가서 재무덤속으로 몸을 숨겼어. 숨을 쉬려면 머리까지 파묻을 수는 없으니까, 머리에는 망태기를 썼지. 결국에는 붙잡혔는데 그때 군인들 하는 말이 ‘언제 옷갈아입고 이렇게 숨을 생각을 했냐’며 혀를 차더라고…”

뒤늦게 지서로 끌려간 유씨는 유치장이 꽉차 사무실에 그냥 남게됐고 이튿날 이른 아침 경찰의 교대시간을 이용해 탈출을 시도했다. “새벽시간인데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거여, 그래서 신발끈을 잔뜩 동여매고 유리창을 열고 죽을 힘을 다해 뛰어 달아났어. 목화밭에 숨어있다 한 아주머니 도움으로 밥도 얻어먹고 괴산 고모집까지 찾아가게 됐어. 고모를 따라 몰래 할아버지 집으로 갔고 다락방에 숨어지내는 신세가 됐지. 그때 아버지는 자수를 시키자고 하셨는데, 할아버지가 ‘지금이 어느땐데, 그건 죽으라고 내보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한마디로 반대하셨어”

반동분자와 부역자를 색출하며 민간인들 서로간에도 살기가 번뜻이던 시절에 남로당 간부출신이 자수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집안의 어른인 할아버지는 극단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유씨를 나이어린 청상과부로 위장해 자신이 소유한 땅이 있는 음성군 삼성면 용대리로 떠나 보낸 것이다. 유씨는 이름을 바꾸고 집안의 어린아이까지 등에 업은채 용대리로 들어왔고 얼마후 혼인뒤 자손이 없는 마을이장 소모씨의 후처로 살림을 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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