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 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 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요한 15:12~17)

“오히려 과거가 힘이 됐기 때문에 저는 제 과거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저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가평꽃동네 ‘희망의집’에서 ‘이쁜이’로 통하는 조용란씨(30·소피아)는 지금이야말로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노라 고백한다.스스로를 억제할 수 없었던 소녀시절, 세상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꿈많은 그 시절에 그녀가 살아온 삶은 희미한 의식의 가닥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지쳐 자신도 모르게 발작하고 마는 처연한 기억들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당당하게 말한다. 세상을 모두 사랑할 수 있노라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일들을 다 하고 싶다고.조씨는 서울 청계천 8가에서만 15년을 산 서울토박이다. 곱상한 얼굴에 미소라도 지으면 귀여운 누이가 되고, 사랑스런 딸이 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된다. 그녀는 퍽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기뻐도 기쁘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슬퍼도 슬프다는 내색을 삼갔다. 조용하고 찬찬한 성격이었던 그녀의 가정은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그녀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부모는 이혼을 했다. 부모의 이혼은 그녀에게 결손가정의 자식이라는 결코 달갑지 않은 멍에를 씌워주었다. 그녀는 그런 집이 싫어졌다.“발단은 먼저 아빠께 있었어요. 매일처럼 마셔대는 술 때문에 하루도 바람잘 날이 없었지요. 아빠의 그런 모습에 질려버린 엄마가 이젠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어요. 엄마에게 남자가 생긴 거죠. 엄마의 바람기로 결국 부모님은 이혼을 하고 말았어요.”그녀는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그러다 그 아빠와도 헤어지는 일이 생기게 됐다. 그녀의 큰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큰아버지가 그녀의 아빠에게 말했다.“자네 딸 제대로 건사도 못 하면서…… 차라리 내 양딸로 입적 시키게.”중학교 2학년 때 그녀는 큰아버지의 양딸로 들어가게 됐다. 그런데 큰집에는 또 하나의 양딸이 있었다. 자식이 없었던 큰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들여온 아이였는데 그녀는 조씨보다 나이가 훨씬 위였다. 그러니까 조씨에게는 졸지에 언니가 생긴 것이었다.“잘 지내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 언니는 그런 제 맘을 몰라주더군요. 큰아버지 앞에선 잘해주는 척하다가 계시지 않으면 온갖 몹쓸 소리를 해가며 구박을 하고, 잔소리를 하고, 이것저것 부려먹고, 때리기까지 했어요. 나날이 그 정도가 심해져갔지요. 그 언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슬픔을 가눌 수가 없게 되더군요. 우리집으로 다시 돌아가고도 싶구요. 그때 정신적으로 너무 큰 상처를 받게 됐어요.”그 집에서의 생활은 어린 조씨에겐 지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정신적인 충격이 조씨가 열여덟 한창 나이에 앓게 되는 간질병의 연원이 된 것은 아닌가 그녀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한다.“결국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죠. 도무지 참아낼 수가 없더군요. 그런데 그 언니가 나를 구박하는 이유가 따로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보니 큰아버지의 재산이 내 앞으로 돼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그 언니가 생각할 때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었겠죠.”조씨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능한 편이었다. 돈을 제대로 벌지 못 하는 위인이었다. 거기에 조씨는 하나의 덤터기로 눌러앉아 있는 형국이었다. 사회 속으로 들어가 돈을 벌고 싶었다. 그러나 간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받아주는 직장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조씨는 결심했다. 당신 한 몸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에게 짐으로 남지는 않으리라.그녀는 꽃동네를 생각했다. 그 곳이라면 의지할 곳 없는 자신의 육신을 거두어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스물두 살, 새파란 청춘의 나이에 그녀는 꽃동네에 입소했다.“아빠는 늘 술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하셨지요. 매일 계속되는 술타령에 엄마는 질려버렸어요. 물론 가정이 풍비박산난 문제의 발단은 엄마에게 있었어요. 술타령에 찌든 엄마가 바람을 피운 거죠. 결국 부모님은 이혼하고, 어머니는 따로 재혼을 하게 됐지요. 엄마를 만난 건 꽃동네에서였어요. 초등학교 졸업 때 헤어진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 했는데 꽃동네 입소한 뒤 보름 후에 한 번 면회를 오셨더군요. 재혼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말을 준비해가지고 말이죠. 앞으론 못 올 것이라며, 이제 우리 인연은 이것으로 매듭을 짓자는 매몰찬 선언을 하면서 말이죠. 처음엔 너무 미웠어요.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약이라던가요. 이젠 엄마의 삶을 엄마 스스로 잘 꾸려나가길, 미국에 가서도 잘 살길 바래요.”그때 미국으로 떠나던 어머니가 준 마지막 선물을 조씨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반지와 목걸이였는데, 반지는 지난 해 빨래를 하다가 잃어버렸고 목걸이는 혹여 또 잃어버릴까 늘 목에 걸고 다닌다. 그렇듯 하나하나 세속과의 인연이, 반지가 없어지고 언제 또 목걸이가 없이질지 모르는 것처럼 뚝뚝 떨어져나가고 있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꽃동네에서 살아가면서 감내해야 할 하나의 숙명인지도 모른다.헤어진 지 8년 된 아버지. 그 아버지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가족과 떨어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증상이 너무 심했고, 우리 가정에서 나를 보살펴줄 여력이 없었던 거죠. 전 의식이 없어 모르는데, 한바탕 소란이 파도처럼 휩쓸고가면, 늘 어지러운 방구석. 자다가도 마구 떨고, 게거품을 물고, 병원도 못 가 약도 못 먹고, 증상은 더욱 심해지고…… 결국 꽃동네밖에 선택할 수 없었죠.”그녀를 보면서 아파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녀는 차마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여 어느날 마음 다잡고 아버지에게 말했다.“아빠, 나 간질병 때문에 아빠 마음 아파하는 것 다 알아. 그런 아빠를 보면 내 마음은 더 아파. 나 꽃동네 갈래. 그곳은 나같은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이래. 나 그 곳에서 잘 살수 있을 거야.”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 침묵은 바로 그녀의 꽃동네 행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그녀는 약을 많이 먹는 편이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는다. 간질로 인한 발작증세는 점점 가라앉은 대신 그 약의 후유증으로 머리가 아프고 어지럽고 금세 나른해진다. 그나마 지금은 약을 먹는 양을 많이 줄였다고 한다.처음 그녀가 꽃동네에 왔을 때 그녀는 쉽게 적응을 할 수 없었다.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빠가 보고 싶어 금방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아빠는 보고 싶은데 이 곳엔 아무도 없잖아요. 외로웠어요. 너무 외로웠어요. 그 외로움은 두려움이었어요. 자살을 세 번이나 시도했었어요.”첫 번째 자살미수.얼어 죽겠다고 그녀는 가평꽃동네 뒷산 꼭대기에 올라갔다. 한겨울에 홑가지 옷이 전부인 채였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추워서 참지 못하고 하산했다.두 번째 자살미수.신경과 약을 계속 모아 두었다. 몇 날 몇 일을 모아 둔 약이 한 통을 넘었다. 그녀는 그것을 몽땅 먹어버렸다. 그러나 며칠 앓고 설사만 하다가 살아났다.세 번째 자살미수.장마가 계속되고 있었다. 우울증이 도졌다. 그녀는 일 주일간 밥을 먹지 않았다. 급기야 비 내리는 밤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를 맞으며 드러누웠다. 일주일간 곡기가 들어가지 않은 탓으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다가 지쳤다. 일주일 굶은 것으로도 삶은 끊어지지 않았다.세 번째 자살 미수 사건이 있은 다음 날 그녀는 깨달았다. 삶이란 그렇듯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죽으려 하는 마음을 잘 살겠다는 결심으로 바꾸어보자. 그러면 무엇인가 보이지 않겠는가. 그래 이제는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녀는 무언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꽃동네 생활이란 게 매일 먹고자고 먹고자는 연속이었었다. 돼지와 다를 바 없는 삶이 내 삶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무언가 의미있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결심했다.그녀는 종이접기를 4년간 했다. 모빌, 카드, 꽃, 꽃바구니 등속을 그녀는 종이로 모두 접을 수 있다. 초급자격증을 따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보람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사물놀이패에서 그녀는 장고를 맡고 있다. 덩기둥기 쿵따쿵따, 가락가락을 매겨가며 장고를 치면 어깨춤이 절로 나고 스트레스가 확 풀린단다. 장고를 치면서 그녀는 자신의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삶의 치졸한 찌꺼기들을 날려보낸다.
그녀가 컴퓨터를 치기 시작한 것은 3년 전. 이제는 희망의집 신문 편집을 그녀가 맡을 정도가 됐다. 틈틈이 쓴 시를 모아 워드 작업을 하면서 기록해 놓은 것도 꽤 된다. 50여 편 되는데 나중에 시집을 만드는 것이 그녀의 꿈이다. 세련된 기교는 없지만, 진솔한 그녀의 마음이 촘촘히 배어 있다.

사랑의 일

사랑의 일은 힘이 들지만
저에겐 다른 힘을 준답니다.
희망과 미래의 자신을 위해
사랑의 일을 해보세요.

남에게 웃음을 주세요.
따뜻한 미소 하나가
당신의 힘이 된답니다.

사랑의 일은 힘이 들지만
저에겐 소중한 힘이랍니다.

늘 평화와 희망을 주는 미소이기에
언제나 저에겐 사랑이 넘치는
하루가 오는 것이겠지요.

그녀의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수예도 1년에 한두 번씩 떠서 작품 전시회 때 출품하곤 한다. 지난 해에는 4편을 냈다. 공동방 화분을 관리하고 키우는 것도 그녀의 몫이다. 화분에서 자라나는 꽃을 보면서 그녀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보곤 한다. 욕심 많고, 똑똑하고, 성취욕이 그녀는 강하다. 외부활동을 왕성하게 한다. 방에 있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밖으로 ‘나돌아’ 다닌다. 그래서 혼날 때도 있다. 언젠가 강 필립보 수녀가 말했다.

“밖의 생활만 열심히 하고 공동체 생활은 소홀해서 쓰겠니? 이것저것 네 마음가는 대로 하는 것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를 감싸안는 공동체 생활에도 참여하거라.”

그녀는 내성적이며 자기폐쇄적이었다. 그런 성격이 이것저것 마음가는 대로 하다보니 이젠 누구와 만나도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넬 수 있는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녀는 레지오 단원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 이번에 분가하면 단장직을 맡게 될 것 같다는데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그녀가 이젠 씩씩하게 말한다.

“제게 맡겨준다면 열심히 해보이죠.”

비교적 활달해진 그녀는 이제 가족들이 눈에 들어온다. 몸을 쓰지 못하는 가족을 보면 도와주고 싶고, 마음이 아픈 가족들을 보면 따뜻한 위로를 준비하고 싶어진다. 극히 이기주의적인 성향이었던 그녀가 이젠 사랑과 봉사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고 한다.

그녀에겐 양아버지가 있다. 허희 바오로 형제님이 바로 그 분인데 6년 전에 인연을 맺게 됐다. 마음아파하며 아빠가 보고싶어 어찌할 바를 몰라할 때 그분은 진짜 아빠가 돼주었다. 갖고 싶은 것 있으면 가져다 주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먹여주던 분이었다. 그녀가 서른이 됐을 때 양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너도 서른이 됐으니 홀로서기를 해야한다.”

올 3월까지 오시더니 발길을 뚝 끊어버렸다.

“너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녀는 발길을 뚝 끊은 양아버지가 보고싶어 엉엉 울었었다. 창가만 바라보며 오늘 오시려나 내일 오시려나 기다리는 마음만 커져갔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고 있다. 양아버지의 그 냉정한 마음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이제 세상을 홀로 서야만 할 서른이 넘은 처녀에게 주어야 할 양아버지의 큰 마음이라는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무엇인가 성취했을 때 그녀는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 작은 행복이 지금 그녀가 살아가는 삶의 가장 소중한 밑천이다. 꽃동네에 들어와서 그녀는 자신보다 더 아픈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은 그나마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가족들, 힘만 닿는다면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주님께서 저를 좋은 곳으로 데리고 오셨구나, 난 선택된 사람이었구나. 그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제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걱정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간질병으로 학교도 중도하차해야 했고, 가족들과 자신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생이별을 겪어야만 했고, 꽃동네 들어와서도 세 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했던, 이제 나이 서른의 젊은 청춘. 그러나 그녀는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 원망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삶은 자신의 것이며, 이런 삶을 주신 것 또한 주님께서 하나의 의미를, 하나의 역할을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의 소원은 한 가지 있다. 온누리에 내리는 함박눈에 세상이 모두 정결한 모습으로 갈아 입듯이 자신의 간질병이 깨끗하게 치유돼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소홀함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그것이 그녀가 갖고 있는 소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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