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내 곳곳에 친일 반민족행위자 공덕비 버젓이 존재
독립운동가 후손, “단죄비로 교훈의 장으로” 여론확산

지난 25일 장기영 광복회충북지부장(사진 오른쪽)은 괴산 문광면사무소에 있는 일제 헌병보조원 송재욱의 공덕비를 찾았다. 송재욱은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한 장기영 지부장의 조부 장일환 선생에게 발포해 숨지게 했다.
지난 25일 장기영 광복회충북지부장(사진 오른쪽)은 괴산 문광면사무소에 있는 일제 헌병보조원 송재욱의 공덕비를 찾았다. 송재욱은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한 장기영 지부장의 조부 장일환 선생에게 발포해 숨지게 했다.

 

“처음에는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이제는 용서합니다. 비석을 문광면사무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송재욱의 비석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으면 좋겠습니다. 두고 두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말입니다”

지난 25일 장기영 광복회충북도지부장은 충북 괴산군 문광면사무소를 찾았다. 문광면사무소에는 1919년 3월 20일 청주시 미원면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에게 발포해 2명을 죽게 한 일제 헌병보조원 송재욱의 공덕비가 설치된 곳이다.

장기영 지부장과 송재욱의 관계는 한마디로 악연이다. 1919년 3월 30일 미원장터에서 송재욱이 발포한 총탄에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장기영 지부장의 조부 장일환(張一煥 , 1882~1919.3.30.) 선생.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에 따르면 장일환 선생은 1919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한봉수(韓鳳洙)로부터 고향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부탁 받고, 동지들과 상의해 3월 30일 주민을 동원했다.

이날 미원(米院)장터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앞길에서 장일환 선생은 독립만세를 외쳤다.

현장에 출동한 일제 헌병들이 태극기를 빼앗고 군중들을 강제 해산시키려 했다. 하지만 만세운동 참여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군중들의 규모는 더욱 커졌고 이에놀란 일제 헌병은 시위에 앞장섰던 신경구를 헌병주재소에 구금했다. 격분한 시위군중은 주재소로 몰려가 신경구의 석방을 요구하는 등 저항은 더 격렬해졌다.

놀란 조선총독부 헌병대는 청주경찰서 수비대의 일부 병력까지 동원하여 시위군중들에게 발포했다.

 

“일제 헌병은 묘까지 파헤치게 했다”

지난 4월 청주시 미원면에 설치된 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 장기영 광복회충북지부장의 기증으로 세워졌다.
지난 4월 청주시 미원면에 설치된 만세운동 시발지 표지석. 장기영 광복회충북지부장의 기증으로 세워졌다.

 

장기영 지부장에게 송재욱은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100년이 지나서야 본보의 <괴산문광면장 송재욱은 미원면 3 1운동 총 쏴 죽인 헌병보조원>(2019년 2월 15일) 제목의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다.

장 지부장은 “할아버지에게 총을 쏜 사람이 일본인 헌병이 아니고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어요. 하지만 누군지는 몰랐어요. 친척 한분은 ‘총을 쏜 사람이 누군지 알지만 알려고 하지말라’고 했지요. 기사를 보고나서야 할아버지를 죽인 사람이 송재욱이란 걸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를 죽인 송재욱의 공덕비가 문광면 사무소에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이날 장기영 지부장은 문광면사무소를 찾아 눈앞에서 송재욱의 공덕비를 직접 목격했다.

공덕비를 본 그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나왔다. 한동안 허공만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장 지부장은 “용서한다. 그의 후손들이나 나 나 다 대한민국 사람 아닌가. 송재욱은 용서할 수 없지만 후손들끼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화합해야 한다”고 말했다.

쉽지 않은 말이었다. 장기영 지부장에 따르면 일제 헌병은 그의 할아버지 장일환 선생의 시신을 5일 동안 수습도 못하게 했다.

만세운동을 계속하면 이렇게 된다는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5일이 지나고 나서 장일환 선생의 시신을 수습해 선산에 모셨다. 하지만 일제 헌병은 공동묘지로 옮기지 않으면 묘를 파헤치겠다고 협박했다. 어쩔 수 없이 후손들은 장일환 선생을 선산에서 공동묘지로 옮겼다.

장기영 지부장은 송재욱의 공덕비에 대해 없에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는 “없애지 말고 이 자리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적어놓은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두고 두고 사람들이 보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잔재를 청산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

 

6일 경북 상주시에 거주하는 손한두(상촌농원 대표)씨가 광복회충북도지부를 방문했다. 장기영 지부장을 만난 손 대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가슴이 막막하다. 아직까지도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청산이 이뤄지지 않아 화가 난다”며 “친일잔재를 청산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손한두 대표도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일제강점기 광복단에 가입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제 주요 인사를 암살하는데 사용할 권총을 보관하다 옥고를 치른 손기찬(孫基瓚, 1886~1979)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손 대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어떻게 살아왔나.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을 하느라 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경북 용화로 보냈다. 어떻게 보면 버린 것이다. 할아버지가 일제에 체포되고 나자 일제는 다시 아버지를 징용공으로 끌고 갔다”고 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이 고난과 고초를 겪었는데 비해 친일파는 여전히 건재하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고 밝혔다.

손 대표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의 잔재를 없애야 한다. 광복회가 중심이 돼서 그들의 죄상을 알리는 단죄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기영 지부장은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회와 함께 논의해서 추진해 보겠다”고 화답했다.

 

시민들은 단죄비세우자는데 지자체는 머뭇머뭇

2016년 제천지역의 시민단체가 세운 가수반야월 친일행적 안내판
2016년 제천지역의 시민단체가 세운 가수반야월 친일행적 안내판
지난 2014년 청주시 상당공원 사거리에 충북지역 시민단체가 친일파 민영은 후손 땅찾기 소송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표지석
지난 2014년 청주시 상당공원 사거리에 충북지역 시민단체가 친일파 민영은 후손 땅찾기 소송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표지석

 

독립운동 관련 단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친일인사들의 공덕비 옆에 단죄비를 세우자는 요구가 높아지고 있지만 정작 일부 지자체는 발목을 잡는 모습을 보여 엇박자를 내고 있다.

현재 충북지역 지자체 차원에서 친일파나 친일 잔재에 대한 단죄비나 안내판이 세워진 것은 단 한 곳.

옥천군은 지난 5월 옥천읍 정지용 생가앞 돌다리에 ‘황국신민서사비 안내판’을 세웠다. 안내판이 세워진 돌다리는 일제강점기 일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져 있는 기념비로 옥천죽향초등학교에 있던 것이다.

시민단체가 세운 단죄 안내판은 제천시에 박달재 정상에 있는 ‘가수 반야월의 일제하 협력행위’ 안내판이다.

이 안내판은 2016년 제천의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제천단양지회가 세운 것이다. 안내판에는 가수 반야월이 일제에 부역하며 만든 ‘일억총진군가’ 등 그의 행적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 안내판을 두고 제천시와 시민단체간 갈등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김진우 민족문제연구소제천단양지회 사무국장은 “제천시는 지금까지 2차례 공문을 보내 안내판을 철거하라고 요구한 상태”라며 “최근에는 박달재노래비와 안내판 모두 철거하자는 것이 시의 입장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음성군은 음성향교에 설치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해용의 공덕비를 철거했지만 단죄비를 세우진 않았다. 나머지 지자체도 현재까지 발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공덕비에 대해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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