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련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3:33~35)

1993년 6월, 그해 결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주련씨(34·소화 데레사)의 삶은 장밋빛은 아니었어도 스물다섯, 그 아름다운 나이가 꿈꿀 수 있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어찌 보면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그 사건은 이씨의 삶을 송두리채 앗아가버렸다. 그리고…… 그리고 그 나머지의 힘겨운 삶은 이씨가 온전히 감수해야만 할 버거운 몫으로 남겨졌다. 이씨의 가정환경은 그리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몇 가지의 가정적인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버텼었다. 적어도 그때의 참혹한 기억으로 남을 사고만 없었다면.이씨의 고향은 부산 남구 문현동.부친이 그녀의 나이 두 살 때 작고하셨는데 그 사연 또한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7남매였어요. 하루는 작은오빠 생일이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생일 선물을 산다고 가게에 들어가 사탕을 고르고 계셨죠. 그런데 그때 과속으로 중심을 잃은 덤프트럭이 느닷없이 그 가게를 덮친 거예요. 그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해요. 제가 두 살 때라 기억은 없지만. 큰언니는 그 충격으로 계단을 내려가다 굴러떨어져 뇌를 다쳤어요. 그래서 간질병이 생겼는데 갈수록 병이 악화돼 가족들 고생이 여간 심했던 게 아니었죠. 가정 형편은 급속히 기울고 가장이 없는 집안에 중심이 될 사람은 큰오빠 밖에 없었죠. 전답 팔아서 7남매에 어머니까지 건사하느라 고생이 무척 심하셨죠.”그런데 불행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나마 믿음직한 가장으로 버팀목이 돼주던 큰오빠에게 사고가 닥친 것이다. 그는 이씨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익사사고를 당했다.“큰오빠가 땀띠가 심해 냄새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자주 물놀이를 갔는데 제가 열두살 때 익사사고를 당한 거예요. 그 충격으로 엄마는 그해 가을 추석을 6일 앞두고 돌아가시구요. 그래서 지금도 추석만 되면 엄마 생각이 간절해져요.”가정이 풍비박산나자 이씨의 친척들은 회의를 가졌다. 불쌍한 녀석들 친척 한 집당 한 명씩 데리고 가서 살자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둘째오빠가 반대했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한 번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다시 합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씨의 둘째오빠는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신문배달원으로 나섰다. 그리고 변변찮은 돈이었지만 알뜰살뜰 동생들의 뒤치다꺼리를 맡아주었다.“여상을 졸업했어요. 집안은 힘들고, 그때 생산직은 돈을 좀 만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게 됐죠. 삼양식품, 동양고무 검사실에도 있었고, 선반 품질관리에 경리생활 등 돈 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았죠.”이씨는 스물 다섯에 서울로 올라와 자취생활을 했다. 서울로 올라와 우연히 사귀게 된 친구, 그 친구는 그녀의 인생에 하나의 ‘빛’이었다.“인복이 많아서인지, 친구들도 많았고, 저를 따르고 좋아하는 몇 명의 친구들도 생겼죠. 그중에 부산 동향인 동갑내기 친구를 만났는데, 친자매보다도 더 친했어요. 서로 의지하고 어려운 게 있으면 나누고. 남자도 있었어요. 같은 회사에 다녔던 상사였죠. 다섯 살 위였는데, 사람이 그렇게 건실할 수가 없더군요. 그 분과 열애에 빠졌는데요, 하루가 멀다하고 저를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데에는 당해낼 재간이 없더군요.”사랑하는 사람과 한 직장에 다니는 것이 주위의 눈총도 있고 해서 이씨는 그 회사를 그만두고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며칠 전 다른 회사에 제출한 입사서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6월, 화창한 날이었다. 맑은 마음처럼 방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가을로 잡힌 결혼 날짜를 셈해보면서 이씨는 행복한 하루를 즐기고 있었다.“청소를 끝내고 옥상에 빨래를 너는데, 갑자기 빨래줄이 끊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위태위태하게 빨래줄을 연결하는데 갑자기 몸이 기우뚱 기울더군요. 난간에서 미끌어져 머리부터 거꾸로 추락하게 된 거죠.”그녀의 기억은 그것이 전부였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버린 그날의 악몽은 황당하게도 빨래를 널다가 범한 부주의에서 비롯됐다. 정확하게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진 그녀는 목뼈 경추 3, 4, 5번과 머리를 크게 다쳤다. 목이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고 뇌에 큰 손상이 가는 중상이었다. 그리고 의식 불명.그녀의 의식불명 상태는 보름을 갔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그러나 몸은 만신창이가 된 뒤였다. 사고 당시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간 친구에게 의사가 말했다.“이 사람 숨 끊어질 것이 확실해요. 여기서 장례를 치를 건가요, 아니면 집으로 데려갈 건가요?”그런 지경으로 이씨는 보름을 살아냈고, 결국 의식까지 회복했다. 그러나 이씨가 살아 남았다는 것은 절망의 긴 터널, 7년간 병마와 싸우고, 고통과 싸우고, 자신과 싸워야 하는, 지난至難한 투병생활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했다.“그해 가을 그분과 결혼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는데, 제 몸이 그런 상태였으니 행복한 꿈은 물 건너 갔던 것이죠. 성실한 사람이었고, 믿음이 가는 남자였고,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이였어요. 내가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었죠. 그 분도 조실부모하여 일찍이 고아가 됐던 분이었죠. 그런 말을 했었어요. ‘난 부모 있는 남자를 원해요.’ 그러자 그 분이 그러더군요. ‘내가 부모 역할까지 할게.’ 심성 고운 그 분의 맘을 돌이킬 수 없어 승낙한 결혼 약속이었는데, 결국 제가 지키지 못한 셈이 된 거죠.”집으로 퇴원한 이씨에게 그가 찾아왔다. 그리고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죽을 때까지 내가 뒷수발 해주겠어.”“가능한 일이 아녜요. 당신이 내 옆에 있으면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비참한 내 몰골을 더 이상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그냥 돌아가세요. 당신이 날 잊지 못하면 내가 죽겠어요.”이씨는 야멸차게 그를 쫓아냈다. 그후로도 그는 몇 번인가 이씨를 찾아왔다. 그러나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그가 찾아오는 것 자체가 고통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났다. 이제는 오지 않는 남자. 그러나 그에 대한 일말의 배신감 같은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이씨는 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그를 보내주는 것이다.’“당시엔 이승에 대한 미련이 없었어요. 전신마비가 됐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죽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뿐이었죠. 그대로 죽었더라면 내 인생의 황금기까지만의 기억이 나를 아는 이들에게 남겨져 있을 텐데, 앞으로 져야 할 내 어깨의 고단한 짐이 얼마이며, 또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을 내 친구와 이웃들의 짐은 또 얼마일까. 정신의 갈피를 제대로 추스리지 못 했죠.”그러나 지금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 죽지 않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살아낸 것은 주님께서 ‘역할’을 주시기 위해 그러신 것이 아닌가, 이씨는 그렇게 느끼곤 한다. 긴 투병기가 시작됐다. 도무지 끝을 알 수 없는 투병이었다. 아니, 끝이 있을 수 없는 투병이었다. 그 투병은 죽어서야 자유로울 수있는 그런 것이었다.친구와 지인知人들의 도움으로 이씨는 하루하루를 힘겹게 꾸려나갔다. 부산이 동향인 친구의 보살핌은 참 각별했다. 그녀 또한 이씨를 극진히 보살필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스물일곱에 결혼한 친구는 1998년 IMF 여파로 남편이 부도를 내고 큰 빚을 져 경황이 없을 때였다.친구와 지인들이 몇 푼씩 거둬들이는 돈으로 이씨는 연명할 수 있었다.“내 그 친구와 사귈 때 친구로부터 ‘독종’이란 말을 참 많이 들었어요. 웬만큼 감기를 지독히 앓아도 약 한 번 쓰지 않고, 크게 다쳐도 예사로 넘겼으니까요. 허투루 쓴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1993년 통장에 1000만원이 넘는 돈이 예금돼 있었는데 그날 사고 이후 병원비와 투병생활로 모두 날려버렸지요.”긴 병에 효자 없다는데 친구의 마음은 참 고왔다. 남편의 부도로 자신도 어려운데 이씨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씨에게는 지금도 잊지 못할 사람들이었다. 긴 투병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욕창이었다. 전신불수라 손가락 발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이 매어있는 몸, 매일같이 누워있다보니 자연히 욕창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운데 등에 생긴 욕창은 더욱 심해 눈 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지금도 이씨의 몸엔 그때 생긴 욕창의 흉측스런 흔적들이 등이며 허벅지며 엉덩이며 전신 여기저기 남겨져 있다.“그땐 욕창이 얼마나 심했는지 의사가 그러더군요. 욕창 때문에 죽을 것 같다구요. 병원에 실려갔을 때도 죽을 것 같다더니 이번에도 그래요. 차라리 잘됐다 싶었는데, 참 제 목숨이 질기더군요.”욕창이 심해 온몸이 썩어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이씨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됐다. 다리, 종아리, 팔꿈치, 엉덩이…… 어디를 가릴 것 없이 욕창으로 인해 그녀의 몸은 썩어들어갔다. 가사假死상태에 빠져 있는 날이 점점 더 많아졌다. 그래도 그녀는 살아났다. 살아남은 그녀를 보고 의사가 또 말했다.“죽었어야 할 사람인데, 이 사람 살아 있네.”욕창 때문에 피가 고갈된 상태였다. 목뼈는 떨어져 전신불수의 상태였고 제대로 대소변을 보는 것조차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었다. 너무 심한 상태라 마취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심신이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한 번 마취를 하면 그대로 깨어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그때 응급치료만 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혈관이 졸아들어 수혈도 불가능했다. 그때까진 살아 있었지만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의사가 다시 말했다.“목을 뚫어 수혈하고 당신 다리 잘라내 엉덩이 욕창부분 떼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정말 죽습니다.”그녀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을 의사에게 주었다.“이대로 죽겠습니다.”“날 두 손 두 발 다 묶어놓고 무얼 하라는 것이에요?”노발대발한 의사는 하루만에 그녀를 강제퇴원조치했다. 이번엔 태릉 성심병원으로 갔다. 그 곳에서 그녀는 욕창치료를 받았다. 수혈도 받았다. 늘 치료와 치료가 반복되는 같은 생활이었다. 병원비로 지출되는 돈은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그런 생활이 1년간 반복됐다.어느날 그녀는 마음을 새롭게 고쳐먹었다.‘나를 위해서, 이 보잘것없는 목숨 살리기 위해서 친구들과 지인들이 저렇게 열심히 뛰는데 나는 내 목숨 쉽게 떨굴 생각만 하고 있었나? 그 분들 도움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좌절해선 안 된다. 친구들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아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 그래, 이제부터는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자. 그리고 무언가 보여주자. 내가 당당하게 살아 남았다는 건강한 모습을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다시금 보여주자.’인생사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데, 내가 태어났다는 것은 미리 내 운명에 무엇인가 주어진 역할을 받고 세상에 던져진 것. 과연 내가 내 세상에서 아직 미정되어 있는 내 역할과 계획을 저버릴 수 있는가. 이제 다시 살자. 이씨는 그런 생각이었다. 어찌보면 그날 이씨가 그런 마음을 다잡게 된 것은 그녀의 삶에 있어 하나의 성년식과 다름이 없었으리라.이씨는 그때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라고 해야 전신불수에 가까웠던 그녀에게는 고작 목을 조금 움직여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에겐 우습기 짝이 없는 그 동작이 그녀에게는 엄청난 정열과 노력을 요구하는 고된 운동이었다.“운동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운동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어요. 처음에는 목을 가눌 수조차 없었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온 시간을 목 운동에 쏟아부으니까 약간씩 움직일 수 있게 되더군요. 위 아래로 끄덕이는 운동, 좌우로 가누는 몸짓, 그리고 마침내 목을 자유롭게 돌릴 수 있게 됐지요. 목을 가눌 수 있게 되자 자신감이 붙더군요. 이제는 어깨운동을 시작했어요. 힘이 붙지 않는 어깨를 가까스로 들썩거려보고, 몇 달을 그렇게 노력하다보니 그것도 가능해 졌어요. 이제는 마지막으로 팔운동 차례였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팔꿈치를 움직여보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더군요. 제 인생을 건다는 마음으로 안간힘을 썼어요. 매일처럼 그렇게 하다보니 팔꿈치까지는 움직일 수 있었어요. 그렇지만 손가락까지는 신경이 가지 않아 불가능했지요. 그래서 지금은 팔꿈치까지 움직일 수 있어요. 그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 거예요. 일반인들에겐 아무 것도 아닌 일이겠지만 저에겐 기적과도 같은 변신이었죠.”그랬다. 그것은 그녀에게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의사는 그녀에게 전신불수의 판정을 내렸다. 그것을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보기좋게 의사들의 판단을 뒤집어버렸던 것이었다. 그녀가 팔꿈치까지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녀 자신도 아직 알지 못할 그녀의 ‘역할’ 범위를 넓혔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것이 무엇보다 그녀를 들뜨게 했다. 그녀의 턱은 아직까지 시커멓다. 목 운동 턱 운동을 하며 매일처럼 손바닥으로 턱을 밀어올리고 돌려대던 탓이다.이씨가 가평꽃동네에 입소한 것은 2000년 4월 12일.그날은 그녀에게 새로운 인생이 열리는 것을 의미했다. 막상 꽃동네에 와서도 그녀에게는 할 일이 없었다. 전신불수에 가까운 몸, 그동안의 노력을 통해 팔꿈치까지는 움직일 수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손가락과 팔 아래 상반신, 그리고 하반신은 신경조차 가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마땅히 그녀에게 주어질 역할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는 그러나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서기로 했다.심신지체가족들이 살고 있는 ‘희망의집’에서 그녀는 자신의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림이 그것이었다. 사실 처음엔 엄두도 내지 못했었다. 그러나 희망의집 가족 가운데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가족들을 보며 그녀는 나도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을 갖게 됐다.그녀는 손가락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그림을 그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녀는 그림을 그린다. 그녀가 그림을 그릴 때 손가락 역할을 팔꿈치가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손등과 손목으로 연결되는 보조기구에 붓을 꽂고 팔꿈치의 각도를 이용해가며 그녀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하여 처음엔 그림이 엉망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 그림 그리는 일에 정열을 쏟게 되자 극복할 수 있게 됐다.“그림은 여유입니다. 여유가 제게 생겼다는 것은 바로 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여백이 자리잡았다는 말이죠. 제 삶의 빛깔을 저는 화폭에 옮기며 늘 행복을 느낍니다. 여유가 있을 때 사람은 세상을 돌아보게 되죠. 각박하고 촉박한 세상에 갇히게 되면 자신을 돌아볼 수 없게 됩니다. 또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지 못 하게 되죠. 그래서 전 그림을 그리면서 갖게 되는 여유가 좋습니다. 처음엔 그날의 끔찍했던 악몽을 돌이키기조차 두려웠지만, 이제는 그때의 일을 다시금 돌이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각하죠. 그날의 일은 주님께서 제게 다른 역할을 주시기 위한 하나의 계기였을 것이라고.”그녀는 기도를 잘 하지 못 한다고 고백한다. 묵주기도를 올려도 어찌보면 형식적인 기도에 그칠 때가 많다고 한다. 그러나 붓을 보조기에 끼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세상일을 잊고 그림 속에 빠져들게 된다고 한다. 기도 드릴 때도 자꾸 생기던 잡념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 말끔히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하여 그녀는 그림을 통해 기도를 드리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림은 그녀에게 있어 구도求道의 통로인 셈이다.“하느님께서 보시면 저는 구박 많이 하실 인간이죠. 기도보다 그림을 좋아하니 말이죠. 기도 아닌 그림에서 안식을 찾으니 말이죠. 그렇지만 전 그렇게 생각해요. 저에게 있어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주님의 세상을 소원하는 하나의 기도라고 말이죠.”그림을 그리면서 그녀의 욕심은 더욱 커졌다. 시詩가 바로 그것이다. 떠올랐던 시상詩象을 그녀는 입으로 펜을 물어 쓰기 시작한다. 물론 손가락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쓴 시가 대학노트 절반을 채워가고 있다. 그녀가 쓴 시 가운데 하나를 소개해보자.동그라미그리워, 그리워, 그리워하다두 눈의 샘이 말라 버리고사무쳐, 사무쳐, 사무쳐하다가슴의 멍이 까맣게타들어 갑니다어제도 오늘도 내일도그리워하고 사무쳐하다목이 길어만 갑니다기다리기는 어렵지 않지만그리움은, 그리움은너무도힘이 겹습니다사무치다 사무치다그려지는 동그라미는기다림입니다그녀를 가르치고 있는 봉사자 선생님의 말을 빌면, 그녀를 처음 봤을 땐 가르칠 수 있겠는가, 비관적인 생각이었다고 한다. 방바닥에 쫙 뻗어 있는데 그림 그리기에는 몸 상태가 너무 불완전했던 것이었다. 그림을 꼭 배우고 싶다는 그녀에게 봉사자 선생님은 속마음을 감추고, “글씨는 쓸 수 있냐, 휠체어는 스스로 밀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못한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말했다. “밥만 먹고 똥만 쌌구먼!”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그녀가 스스로 휠체어를 밀고 다닐 수 있고, 스스로 글씨를 쓸 수 있을 때 가르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진 장애를 극복하고 글씨를 쓰고 스스로 휠체어를 밀 수 있게 됐다.“언젠가 스스로 이만하면 출품할 만한 그림은 되겠다 싶을 때 저를 도와준 분들께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들의 고생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신들이 살려주신 제 목숨이 이제는 이렇듯 그림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눔아 잘 살려냈구나, 그런 생각이 들도록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그동안 자신을 보살펴주었던 사회의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그리고 자신을 거두어준 꽃동네에게 간접적인 ‘빚 갚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사실 녹록한 작업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움직이기 어려운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가며 한 점, 한 필치를 그려내는 것은 마치 구도의 자세와도 같아 보인다.

처음에는 한 작품 그리는데 보름을 훨씬 넘겼는데, 이제는 일 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그녀의 소망은 정식으로 화단畵壇에 데뷔해 그림을 그리고 개인전을 갖는 것이다. 자신에게 그림이라는 하나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즐겁고 죽을 때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 그녀에겐 행복이다.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듭니다. 순간순간이 행복이었구나. 불행을 딛고 일어설 때마다 생기는 것이 행복이었구나. 하여 불행과 행복은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엇갈리는 협주곡은 아닐까 말입니다.”

그녀의 그림을 썩 훌륭하다고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림을 그려보지 못 했던 그녀가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1년 조금 더 넘겼을 뿐이기 때문이다. 수준으로 치자면 고등학교 고학년 수준 정도. 그러나 그녀의 억누를 길없는 정열과 절망을 딛고 일어선 강인한 정신이 있는 이상, 그녀의 그림은 더욱 빛을 발할 일.

화가 이주련의 개인전이란 타이틀 아래 힘들었던 지난 날을 돌이켜보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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