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歲暮)입니다. 이제 엿새면 2004년이 속절없이 막을 내리고 2005년, 을유년을 맞이합니다. 일년이라 해봤자 끝없는 영겁의 세월에 견줘보면 찰나에도 못 미치는 미세한 시간 단위에 불과할진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지마는 그래도 현실세계를 사는 유한한 인간이기에 송구영신의 감회가 없을 수 없습니다.

불가(佛家)에 영겁(永劫)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에 3천년마다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잠시 놀다 올라갑니다. 그런데 선녀의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이 스쳐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 기나긴 시간을 겁(劫)이라고 합니다.

그 겁이 끝없이 계속이 되는 것이 영겁이거니 영겁이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월을 뜻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렇다면 영겁이란 우매한 우리네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관념의 세계일 뿐입니다. 한데도 사람들은 찰나에도 못 미치는 그 일년을 놓고 “한 해가 갔다”, “세월이 빠르다”고 입을 모아 탄식합니다.

어찌했든 올 한해도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를 가릴 것 없이 모든 분야가 가진 것 없는 보통사람들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겨웠던 한해였습니다. 국민을 평안하게 해주어야 할 정치는 평안은커녕 되레 정쟁으로 국민을 피곤하게 만들었고 되살아 날 줄 모르는 경제는 그날 그날을 살아가는 서민들을 더욱 옥죄었습니다. 온통 봇물 터지듯 분출하는 집단이기주의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된 사회는 영일(寧日)이 없을 만큼 갈등과 대립으로 날이 새고 졌습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날씨가 추우면 가장 고통스러운 건 사회적 약자들입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이들이야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라고 즐겨 말 하지만 추운 잠자리에 배고픔으로 겨울을 나는 이들은 이때가 바로 지옥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라면박스를 깔고 새우잠을 자는 노숙자들, 양로원 고아원의 무의탁 노인들과 부모 없는 아이들, 일자리를 못 찾고 혹한의 거리를 방황하는 구직자들, 단속의 눈을 피해 숨어사는 조선족 동포들과 외국인 노동자들, 이들에게 이 겨울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한해를 밝혀 온 검붉은 태양은 노을을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숨어들고 온 종일 하늘을 날던 새들, 둥지를 찾아 숲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는 도시에서는 삶에 지친 군상(群像)들, 긴 그림자를 이끌고 제집을 향해 골목길을 돌아갑니다. 분류(奔流)처럼 숨가쁘게 달려온 한 해, 이제 슬펐던 일, 괴로웠던 일, 모두 훨훨 날려보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실낱같은 희망으로나마 새해 아침을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밤이 가면 아침은 오고 태양은 변함없이 동녘하늘에 다시 떠오를 테니까요. 그리하여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 마다 날 마다 좋은 날이 되기를 다 함께 기원해야 하겠습니다.
한해동안 졸문을 읽어주신 강호제현(江湖諸賢)께 감사드립니다.  / 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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