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가 스승을 ‘빨갱이’라 지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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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스승을 ‘빨갱이’라 지목했다
  • 김다솜 기자
  • 승인 2019.07.05 17: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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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빨갱이 교사입니다 ②] 법정에서 스승과 제자가 만났다

1989년은 교사들에게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그 해 5월 28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됐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전후로 수많은 교사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전교조 결성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안 사건이 동원됐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에게 ‘빨갱이 교사’라는 낙인이 붙었습니다. 

강성호 교사도 피해자입니다. 강 교사는 북침설을 가르친 교사가 되어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강 교사는 유죄입니다. 전교조도 여전히 법 밖의 노조입니다. 강성호 교사는 재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충북인뉴스>가 부임 두 달 만에 간첩으로 내몰렸던 강성호 교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듭니다. - 편집자 주 

호송 차량 안 공기는 한없이 무거웠다. 강성호 씨는 손목에 수갑을 차고, 몸통에 탄탄한 포승줄을 두른 채 홀로 25인승 차량에 올랐다. 곧 스무 명의 경찰들이 따라 탔다. 강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끌려 온 죄인이었다. 사방에서 그를 감시했다.

강 씨는 제천경찰서 대공과에서 청주교도소로 이감되는 중이었다. 차량이 첩첩산중 산봉우리를 지나는 내내 강 씨의 표정은 어두웠다. 청주 시내로 들어서자 창밖을 바라보던 그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차창 너머로 가방을 멘 아이들이 교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꽁꽁 묶여서 너희들과 멀어지고 있지만 너희들이 알고 있는 진실은 묶어둘 수 없을 거야. 반드시 학교로 돌아가서 너희들을 만날 거야.”

1989년, 강 씨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강 씨는 국가보안법에게 청춘을 빼앗겼다. © 김다솜 기자
1989년, 강 씨의 나이는 스물여덟이었다. 강 씨는 국가보안법에게 청춘을 빼앗겼다. © 김다솜 기자

 

강성호 씨는 ‘만들어진 간첩’이었다. 89년 3월, 강 씨는 사범대를 갓 졸업하고 충북 제천 제원고(現.제천디지털고등학교) 일본어 교사로 발령받았다. 새내기 교사였던 강 씨는 여섯 명의 제자에 의해 간첩으로 고발당했다. 그 학생들은 강 씨가 수업 시간에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을 가르쳤다고 주장했다. 

결론은 ‘당신은 간첩’

평소 강 씨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학교장과 육성회장은 그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다. 그렇게 그는 교실을 떠났다. 제천경찰서에서 강 씨는 진술을 강요받았다. 철제 책상 하나, 의자 하나가 전부인 조사실에 형사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형사들은 두세 명씩 돌아가면서 종일 강 씨를 압박했다. 형사는 강 씨가 앉은 쪽을 향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당신, 학생들한테 북침설을 가르쳤잖아! 그렇지? 여기다 그 사실을 인정한다고 써.”

“그런 적 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교사가 아니라 간첩이야. 간첩.”

“아닙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매번 같은 얘기가 오갔다. ‘간첩’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서 ‘정말 내가 간첩은 아닐까’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끝까지 버텼다. 형사가 북침설에 대해 물으면 강 씨는 입을 닫았다. 그럴 때면 형사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기다 써.”

답할 수 있는 문제였다. 강 씨는 ‘남과 북이 분단된 현실에서는 일정 부분 보안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형사는 코웃음을 쳤다. 


“이거 전형적으로 간첩이 하는 수법이야. 나한테 이런 게 통할 줄 알아?”

검사를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강 씨 하숙집에서 발견된 책 속에 적힌 구절을 가리키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거나 88올림픽, 남북 분단 현실에 대해 쓰라고 강요했다. 답변들이 어떻게 쓰였는지는 공소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강 씨의 하숙집에서 발견된 책. 제천서 대공과 형사들은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강 씨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 김다솜 기자
강 씨의 하숙집에서 발견된 책. 제천서 대공과 형사들은 압수수색 영장도 없이 강 씨의 하숙집에 들이닥쳤다. © 김다솜 기자

 

  • ‘계급투쟁론을 주장하면서 피착취 계급인 노동자 계급이 착취 계급인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여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이념 하에 대남적화통일을 목표로 삼고…’

강 씨의 항변은 하나도 공소장에 담기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해도 결론은 ‘당신은 간첩’으로 끝났다. 공안 검사의 능력은 실로 탁월했다. 

법정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    

어느 날 서울에서 한 남자가 강 씨를 찾아왔다. 김동현 변호사였다. 김 변호사는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 제천고 교사로 근무했다. 이 사건을 맡기에 적임자였다. 당시 강 씨 구명 운동을 하던 전교조 충북지부 도종환 씨(現.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가 직접 김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김 변호사는 강 씨에게 안타깝다는 말을 되풀이하고 떠났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이런 일이 교실 안에서 벌어지다니…. 학생과 교사의 수업 내용을 문제 삼아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 사례는 저도 처음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강 씨의 구명을 위해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진실이 재판에서 알려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첫 공판이 열리기 전날 밤, 강 씨는 손바닥에 글씨를 썼다. 제천지방법원으로 재판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다. 다음날 강 씨는 호송 차량에 오르면서 혹여나 경찰들에게 들킬까 봐 주먹을 꽉 쥐었다. 

호송 차량이 법원 앞에 멈추자 전교조 충북 지부 사람들과 동료 교사들이 강 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강 씨는 두 손바닥을 크게 펼쳤다. 강 씨의 손바닥에는 '진실', '승리' 두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천신문에서 포착한 강성호 씨의 모습. 강 씨는 진실이 승리할 거란 기대를 품고 법정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빗나갔다. © 김다솜 기자
제천신문에서 포착한 강성호 씨의 모습. 강 씨는 진실이 승리할 거란 기대를 품고 법정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빗나갔다. © 김다솜 기자

 

스승과 제자가 법정에서 다시 마주했다. 강 씨가 북침설을 주장했다고 진술한 학생들의 증언이 엇갈리면서 재판은 승리와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김 변호사가 증인에게 물었다.

“강 선생님 수업에 맥락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북침설 얘기가 나오기 전후에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설명해볼래?”

대답은 놀라웠다. 

“제가 잠결에 들어서….”

“수업 시간 중에 엎드려 있었어요.”

“옆 학생이랑 잡담하고 있어서 기억이 안 납니다.” 

북침설을 들었다는 학생 모두 그 얘기가 나온 맥락이나 수업 내용을 말하지 못했다. 판사가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맨날 잠만 자나? 공부 좀 열심히 하지 그래.”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김 변호사가 출석부를 들고 나왔다. 진술을 한 학생 중 두 명이 문제가 된 수업에 불참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해당 학생은 자기 기억에 확신이 없다면서 상황을 모면하려 했다. 


일관된 항변, 엇갈린 진술 

강 씨는 결코 북침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수업 시간에 일본인 사진작가가 낸 ‘보고 싶은 산하’란 이름의 사진첩을 보여준 게 전부였다. 사진첩에는 평양 시내와 백두산, 금강산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지상파에서도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의 영향을 받아 북한 실상이 자주 방송되던 터라 문제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사건의 발단은 2학년 7반 수업 시간. 당시 강 씨는 제원고의 유일한 일본어 교사였는데 그 반에서 했던 두 번의 수업이 문제가 됐다. 전교생 900명 중 북침설을 들었다고 주장하는 학생은 2학년 7반 학생 여섯 명밖에 없었다. 강 씨의 항변을 뒷받침하는 증언도 나왔다. 

“선생님이 북한 시내에 김일성 동상이 세워진 사진을 보여주면서 아마 서울에 이런 동상이 있다면 남아있지 못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선생님이 북침했다는 말을 했다면 저 스스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겁니다. 선생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어요.”

2학년 7반 반장이었던 학생 한 명이 강 씨를 변호했다. 나머지 학생들이 쓴 탄원서도 판사에게 제출됐다. 탄원서 내용과 강 씨의 항변은 일치했다. 

  • ‘민주주의에서는 소수 의견보다 다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데 어찌 소수 의견을 따르는지 이상하다. 이 일은 왜곡된 일이다.’
  • ‘앞에 앉은 학생은 듣지 못한 이야기를 뒷줄에 앉은 학생들이 어떻게 들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
  • ‘교장 선생님과 육성회 임원들이 사전 계획해서 이뤄졌다고 생각합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강성호 선생님이 학교 운영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그걸 미끼로 어떻게 자를지 생각 끝에 이런 사건을 만들었습니다.’ 

 

이미 ‘빨갱이’로 낙인찍힌 교사가 갈 곳은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강 씨는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김다솜 기자
이미 ‘빨갱이’로 낙인찍힌 교사가 갈 곳은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강 씨는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 김다솜 기자

그동안 재판을 지켜 본 김시천 교사는 이런 시를 남겼다.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 말하는 일이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강선생님

수갑을 찬 채로 손을 흔들며 

애써 애써 몰래 썼을 손바닥에 감추어 보여준 

두 마디 말이 내내 가슴을 뒤흔듭니다 

"진실!", "승리!"

강선생님이 빨갱이라니요 

검은 것은 검다 하고 흰 것은 희다 하고 

그렇게 가르 친 게 죄가 되었나요 

교단 일기 8 - 강선생님께 중 일부 

 

재판부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이 사건은 일관된 항변이 졌고, 엇갈린 진술이 이겼다. 형사도, 검사도, 판사도 결론은 같았다. '당신은 간첩'. 강 씨는 1심에서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수감 생활을 하던 강 씨는 1990년 1월 25일 청주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에서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고 8개월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이후 1990년 6월 22일 대법원이 상고 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진실은 철창 안에 갇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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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맞지않냐 2019-07-07 12:51:05
남침인데 북침이라니? 요즘시대였으면 훌륭한빨갱이라고 인정받겠지만 그때는아니지... 그때는 대통령이였고 지금은 빨갱이새끼가 청와대장악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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