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서 간첩으로, 뒤집혀버린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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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에서 간첩으로, 뒤집혀버린 인생
  • 김다솜 기자
  • 승인 2019.06.2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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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빨갱이 교사입니다 ①] 부임 두 달 된 초임 교사는 간첩이 됐다

1989년은 교사들에게 의미가 깊은 해입니다. 그 해 5월 28일,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가 결성됐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전후로 수많은 교사들이 고초를 겪어야 했습니다. 전교조 결성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공안 사건이 동원됐습니다. 전교조 교사들에게 ‘빨갱이 교사’라는 낙인이 붙었습니다. 

강성호 교사도 피해자입니다. 강 교사는 북침설을 가르친 교사가 되어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강 교사는 유죄입니다. 전교조도 여전히 법 밖의 노조입니다. 강성호 교사는 재심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충북인뉴스>가 부임 두 달 만에 간첩으로 내몰렸던 강성호 교사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듭니다. - 편집자 주 

꿈인가, 생시인가.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대공과 조사실이라니…. 강성호 씨는 믿을 수 없었다.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매끄러운 수갑 표면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차가움을 느꼈다. 생시였다. 

그 시각 조사실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뉴스가 흘러나왔다. 강 씨가 무심코 지켜보던 뉴스 화면 속 앵커는 또박 또박 말을 뱉어냈다. 

“전교조 결성을 앞두고 학교 현장에서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충북 지역 학교 현장에서 북침설을 가르치던 교사가 구속됐습니다.”

 

1990년 6월 22일, 강성호 씨는 유죄 판결을 받고 최종적으로 교사 직위가 박탈됐다. © 강성호
1990년 6월 22일, 강성호 씨는 유죄 판결을 받고 최종적으로 교사 직위가 박탈됐다. © 강성호

 

강 씨의 얼굴이 저녁 뉴스 화면을 가득 채웠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보기를 반복했다. 자신의 얼굴이 분명했다. 뉴스 속에서 강 씨는 아이들에게 북침설을 가르친 ‘빨갱이 교사’가 됐다. 

“한편 충청북도 교육위원회는 오늘 날짜로 강성호 교사에 대해 직위 해제 조치를 내렸습니다.”

앵커의 마지막 멘트를 들은 순간 강 씨의 고개가 떨궈졌다. 강 씨는 부임한 지 두 달 된 초임교사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강 씨는 시곗바늘을 되감았다. 시곗바늘은 강 씨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에서 멈췄다. 


시골 학생의 순박함이 좋았다  

89년 3월, 강 씨는 교사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초임 교사 발령을 받은 제천 제원고등학교(충북 제천시 봉양면 소재·現 제천디지털전자고등학교)는 고향 경남 진주에서 9시간이 걸렸다. 제천 시내에서도 버스로 20여 분이 걸리는 면 소재지의 작은 학교였다.

교탁이 없어 책상으로 대신할 정도였다. 열악한 재정으로 인한 피해와 책임은 학생들이 짊어졌다. 야간 자율학습을 감독하는 교사에 대한 수고비가 필요하다며 자율 학습비를 내라고 했다. 전교생에게서 청소년 적십자회비도 걷었다. 학교 운영을 위한 시설비가 여러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각출되고 있었다. 그나마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초임 교사가 편했던 지 학생들은 강 씨를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저희가 보충 수업비를 내는 건 이해가 되는데 보충수업비에 방충망 설치 비용이 왜 들어 간 거죠? 보세요, 방충망은 지금도 있지 않습니까.”

강 씨가 봐도 이상했다. 방충망은 이미 있었다. 교무회의에서 강 씨가 손을 드는 일이 잦아졌다. 학교 관리자들은 눈살을 찌푸리며 강 씨를 쳐다봤다. 걷히는 돈이 상당했다. 모든 것은 교장단 회의에서 비공개로 정해졌다. 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없었다. 교육 방송용 VTR 구입을 위해, 교사용 의자를 사는 일에 학생들의 돈이 쓰였다. 

“이 학교 애들은 무녀리여, 무녀리. 제천고, 충현고 거쳐서 거를 대로 걸러서 갈 데 없어 온 애들이라구. 꼴통이라구, 꼴통.”

선배 교사는 학생들을 가리켜 ‘무녀리’(한 번에 여러 마리 새끼를 낳을 때 제일 먼저 나오는 바람에 힘이 없는 새끼 또는 말이나 행동이 모자란 사람을 이르는 말)라 불렀다. 하지만 강 씨는 도시 학생의 똑똑함보다는 시골 학생의 순박함에 더 끌렸다. 

충북 제천 제원고로 처음 발령 받았던 당시 인사 기록 카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스물 여덟살의 초임 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교단에서 물러나야 했다. © 강성호
충북 제천 제원고로 처음 발령 받았던 당시 인사 기록 카드.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스물 여덟살의 초임 교사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누명을 쓰고 교단에서 물러나야 했다. © 강성호

초임 교사의 시계는 빨랐다. 학년 별로 6학급씩 총 900명의 학생이 있었다. 제원고에서 유일한 일본어 교사였던 강 씨는 일주일에 30시간이 넘는 수업을 맡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대로 안부도 전하지 못했다. 강 씨는 연필을 들었다. 제일 먼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 위해서였다. 강 씨는 초임 교사의 고민을 담아 편지를 써 내려갔다. 

 

  • “똑똑한 학생보다는 머리는 비록 조금 부족하지만 열심히 살려는 학생들을, 넉넉한 환경에서 부족함을 모르는 살아가는 도시의 학생들보다는 수업비를 걱정하며 선생님에게 미안해하는 이 아이들을 더 사랑하려고 합니다.” - 1989년 3월 12일 아침, 하숙집에서 부모님께 

 

  • “제천 시내에서 1차 응시하여 쓴잔을 마신 학생들이 진학한 학교라 학생들은 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 무엇보다 따스한 사랑으로 감싸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 1989년 3월 13일 학교에서, 고교 동창 태훈에게 

 

교협 가입, 그게 시작이었다 

동료들과 함께 고민을 나눴다. 작은 마을에서 하숙을 하는 집은 한곳밖에 없었고 미혼 교사들은 그곳에 모여 살았다. 초임 교사이자 한 지붕 아래 살던 세 사람은 교사협의회(전교조의 전신, 이하 교협)에 가입서를 내밀었다. 적극적으로 학교 현장의 문제점들을 개선해나가고 싶은 의지였다. 

학교 관리자들은 이들을 눈 여겨 봤다. 교장은 교협에 가입한 교사들에게 지도안을 제출하라고 지시했다. 평소 쓰는 교재나 수업을 보고하라는 말이었다. 때때로 누군가 자리를 뒤진 것처럼 교사들의 책상이 흐트러져 있기도 했다. 수업 시간에도 학교 관리자들의 감시를 피할 수 없었다. 

강 씨는 교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느꼈다. 교장이 강 씨를 쳐다보고 있었다. 교장은 뒷문을 열어젖히고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교장 선생님?”

강 씨의 물음에도 교장은 답하지 않고 학생들의 노트를 뒤적였다. 노트 위에 필기된 내용을 자신의 수첩 위에 옮겨 적고는 다시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런 일이 수시로 벌어졌다. 한 달 뒤 강 씨는 교장실로 불려갔다. 교장실 소파에는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남자가 말했다. 

“강 선생님, 잠시 서에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저는 다음 수업도 있고 일과 중에 외부에 가려면 교장 선생님 허락이 필요한데요.”

교장은 가보라고 손짓했다. 남자들은 정중했다. 강 씨에게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라며 농담을 던졌다. 강 씨는 두 남자와 웃으면서 교장실에서 나왔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학교 운동장에는 검은색 지프차가 강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 씨의 구속은 신문과 방송 가릴 것 없이 세상에 알려졌다. 판결을 받기 전부터 언론은 강 씨에게 '의식화 교사'라는 낙인을 찍었다. ©경향신문
강 씨의 구속은 신문과 방송 가릴 것 없이 세상에 알려졌다. 판결을 받기 전부터 언론은 강 씨에게 '의식화 교사'라는 낙인을 찍었다. ©경향신문

 

 

차 문이 닫히자 남자들은 돌변했다. 교장실에서는 ‘강성호 선생’이라 불렸는데 ‘이놈’, ‘저놈’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주먹과 손이 강 씨를 향해 날아들었다. 남자들은 자신을 제천경찰서 대공과 형사라고 소개했다. 검은색 지프차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강 씨의 하숙집이었다. 

형사들은 강 씨의 하숙집을 헤집었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형사는 <한국 전쟁의 기원>,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통일 이야기> 등 강 씨가 소장한 책 몇 권을 집어 들었다. 이미 허가가 나서 시중에 출판된 책이었다. 형사는 <한겨레신문>과 강 씨가 듣던 테이프도 압수했다. 

“하, 이 간첩XX…. 하숙집에서 북한 책을 많이도 읽었네.”

제천경찰서 대공과에 도착하니 강 씨의 호칭은 또다시 바뀌어 있었다. ‘간첩’으로. 

학생들이 고발한 선생 

강 씨는 자신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저녁 뉴스로 확인 사살 당했다.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계속해서 시간을 되감아도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제원고 학생 한 명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조사실에 들어왔다. 강 씨는 서둘러 수갑이 채워진 손목을 다리 사이로 밀어 넣었다. 

“저 선생님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었지?”

형사는 학생에게 물었다. 학생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서 답했다. 

“6·25가 북침이라고 가르쳐 주셨어요…. 평양이 우리보다 잘 산다는 얘기도… 하셨고요.”

그리고 세 명의 학생들이 더 들어왔다. 2학년 7반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강 씨는 강요된 진술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 강 씨는 유치장 독방에 갇혔다. 강 씨의 시곗바늘은 학생들이 말한 1989년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으로 돌아갔다. 

그날 수업 자료는 일본인 사진작가 쿠보타 히로지의 사진첩 ‘보고싶은 산하’였다. 당시 <한겨레신문>이 쿠보타 히로지 씨와 독점 계약해 한국에서 출판한 사진첩이었다. 강 씨는 사진첩 속 백두산과 일본인 친구에게서 받은 후지산 사진을 번갈아 보여주면서 말했다. 

강 씨가 당시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사진들. 백두산(좌)과 평양 시내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우)이 수업 자료로 쓰였다. © 김다솜 기자
강 씨가 당시 학생들에게 보여줬던 사진들. 백두산(좌)과 평양 시내에 세워진 김일성 동상(우)이 수업 자료로 쓰였다. © 김다솜 기자

 

“백두산은 해발 2,744m고, 후지산은 3,776m예요. 일본어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후지산은 백두산보다 높다’(ふじさんは ペクトゥサンより たかいです。)라고 할 수 있겠죠? 언제가 통일이 된다면 여러분도 백두산에 갈 수 있겠지요.”

강 씨는 평양 시내의 사진도 보여줬다. 학생들은 평양 유원지에서 가족들이 노는 사진을 보면서 눈이 동그라졌다. 평양 시내 한가운데 세워진 김일성 동상이 실린 사진을 학생들 눈앞에 내밀었다. 

“여러분이 보기엔 평양이 잘 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랑 체제가 많이 달라요. 서울에 이런 동상이 있다는 게 상상이 되나요?”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강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 김다솜 기자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강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 김다솜 기자

대학가를 중심으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불던 때였다. 지상파에서도 북한에 관한 영상물이 많이 나왔다. 중앙일간지에서 출판한 사진첩이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도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6·25 전쟁을 두고 ‘북침에 의한 전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북한 찬양이라 볼 만한 내용도 전혀 없었다. 

학생 몇 명의 진술이 강 씨를 옭아맸다. 강 씨는 국가보안법 사범이란 이유로 24시간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신문과 TV는 접할 수 없었고, 화장실 갈 때마다 경찰의 눈이 따라왔다. 강 씨는 5개월 동안 제천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립됐다. 그곳에서 강 씨는 '교사'에서 ‘간첩’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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