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는 살아있다 ②] 대통령 별장 때문에 마을 하나가 날아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3년에 만들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국민에게 반환한 대통령 별장 청남대. ‘풍경이 마음에 들어서’ 청주시 문의면에 별장 건설을 지시했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온갖 스포츠 시설들을 그곳에 갖추고 가족들과 함께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별장에 헬기를 타고 드나들던 그 시각, 평화롭던 문의면의 모습은 달라지고 있었다. 주민들은 살던 집도 생업도 포기하고 숨죽인 채 살아야 했다. 모든 건 ‘각하’가 휴가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즐기기 위한 조치였다. - 편집자 주 

 

 

“이거 보면 뭐 대통령 왔나보다 하는 거지.”

이광희 씨(71, 문의면 괴곡리 주민)가 땅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봤다. 군홧발과 프로펠러 소리는 대통령이 왔다는 신호였다. 희미하게 들리던 군홧발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묵직하면서도 규칙적인 소리였다. 충북 청주 시내부터 문의면까지 약 25km의 거리를 군인들이 메웠다. 

하늘에서도 웅장한 소리가 들려왔다. 헬기 세 대가 문의면 상공을 지나갔다. 프로펠러는 쉴 새 없이 돌아갔고 이내 시야에서 헬기들이 사라졌다. 1983년, 이 씨는 자신의 청춘을 그렇게 기억해냈다. 이 씨의 젊은 날이 크게 뒤틀린 적이 있었다. 바로 전두환 대통령이 지은 별장, 청남대 때문이었다. 

이 씨는 가수 남진이 부른 <님과 함께>를 흥얼거리며 좌우로 몸을 흔들었다. 

“님과 함께 노래 알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전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근데 뭐….”  

그는 청주에서 나고 자라 서울서 직장을 잡았다. 대기업 공채 1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취직 후 곧장 결혼에 골인. 아내와 함께 고향 문의면 괴곡리로 돌아왔다. 괴곡리는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젊으나 늙으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농사밖에 없었다. 이 씨는 축사를 지었다. 소 30마리에서 출발했다. 1년 사이 소는 180마리로 늘었다. 

급하게 축사를 정리하느라 이 씨는 크게 손해 봤다. 80만 원에 샀던 소를 1년 뒤에 처음 샀던 값을 받고 팔았다. 1년 동안 소를 키운 비용은 받지 못했다. 대통령 지나가는 길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겼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급하게 축사를 정리하느라 이 씨는 크게 손해 봤다. 80만 원에 샀던 소를 1년 뒤에 처음 샀던 값을 받고 팔았다. 1년 동안 소를 키운 비용은 받지 못했다. 대통령 지나가는 길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하루아침에 밥줄이 끊겼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대통령께서 이곳에 ‘제2의 청와대’(이하 청남대·대통령 전용 별장)를 짓는다고 하니 거기로 통하는 길에 있는 이 마을은 축사도 지어선 안 되고, 주택도 양옥식으로 바꿔야 해요.” 

공무원들은 마을회관으로 사람들을 불러 주택 평면도를 건넸다. 3채 이상의 한옥을 포함해 프랑스식 집, 2층 슬라브 집, 합각 집. 정해준 형태로 집을 지어 살지 않으면 괴곡리를 떠나야 했다. 보상금은 300만 원. 집 한 채 짓는데 1,500~2,000만 원이 들던 때였다. 정부는 주민들이 빚을 낼 수 있는 은행을 알선해준 뒤 입을 닫았다. 이 씨는 귀를 막았지만 수시로 마을을 들쑤시는 공무원들은 막을 수 없었다. 

산골에서 평생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 도심 중산층이나 지을 법한 양옥집에서 살게 됐다. 이유는 하나였다. 대통령 각하 보시기에 좋지 않다는 것. 이 씨는 데모라도 할까 싶었다. 마을 어른들은 “그러다 징역 산다”고 이 씨를 뜯어말렸다. 나라님 말씀이 곧 법이던 그 시대에 괴곡리 주민들은 제 손으로 집을 헐고, 빚을 졌다. 

“광주만 아픈 게 아니라 그 사람(전두환)이 거쳐 간 곳은…. (전 씨가) 아웅산 가서 ‘꽝’하고 난 뒤(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에 경계가 심해진 거 같더라고.”

청남대를 지나가는 길은 민간인 및 외부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됐다. 군부대 하나가 대통령 경비로 들어왔다. 무장한 군인들이 매복하고서 날카로운 눈으로 주민들을 쳐다봤다. 전 씨가 청남대에 머무는 날이면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일주일 치 식량을 사 비축했다. 전 씨가 호화 휴양을 즐기는 동안 괴곡리 주민들은 숨죽여 살았다. 

류덕웅 씨는 양옥집을 짓기 위해 은행에다 빚을 끌어다 썼다. 국가는 류 씨에게 강제로 빚을 지게 만들었다. 벌이보다 이자가 컸다. 잠들기 전 밤마다 야반도주를 고민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류덕웅 씨는 양옥집을 짓기 위해 은행에다 빚을 끌어다 썼다. 국가는 류 씨에게 강제로 빚을 지게 만들었다. 벌이보다 이자가 컸다. 잠들기 전 밤마다 야반도주를 고민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전 재산이 날아갔다 

 

청남대 개발 취소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문의면 주민들은 휴양지를 찾을 관광객을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건 군부 정권의 통제와 억압이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청남대 개발 취소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문의면 주민들은 휴양지를 찾을 관광객을 기대했지만 돌아오는 건 군부 정권의 통제와 억압이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1980년, 신협을 다니던 스물일곱 살 김태화 씨(65, 문의면 미천리 주민)는 신문을 읽다 입이 크게 벌어졌다. 고향 문의면이 ‘국민관광휴양지’로 바뀐다는 기사였다. 정부는 80년부터 89년까지 1차, 2차로 나뉘어 대청댐종합관광개발계획을 수립한다고 발표했다. 1차 기간 동안 15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투자를 하는 국가 산업이었다. 김 씨는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서 큰형님에게로 달려갔다. 

돈 냄새는 빠르게 퍼졌다. 서울에서, 대전에서, 부산에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현금 보따리를 들고 문의면을 찾았다. 김 씨는 형제들과 함께 문의호반개발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문의면 관광지 활성화를 주도적으로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사람들은 ‘동양 최대 유원지가 들어선다’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식당, 잡화점, 다방 등 100여 곳이 새 간판을 내걸었다. 

  • ‘당국의 관광 시설 계획은 호텔 3개소, 여관 20여 개소, 유스호스텔 등 1만 9백 명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과 휴게소와 산장, 전망대를 마련하고 공원, 민속보존마을, 토산품전시장, 주차장 등을 오는 86년까지 모두 갖출 계획이다.’ - 1981.01.10.일자 <경향신문>

 

 

김 씨 집안은 호텔과 골프장을 짓기 위한 토지 매입부터 대형 여객선 2대와 모터보트 17대를 사들였다. 전 재산을 문의면 관광 개발에 투자했다. 대형 여객선 두 대가 기적 소리를 울리면서 대청호를 돌았다. 대전, 청주에서 몰려온 사람들은 뱃놀이를 위해 줄을 섰다. 당시 김 씨는 모터보트 두 대 돌리면 하루 100만 원 넘는 돈을 손에 쥐었다. 

“근디 청남대로 인해서 한방에 물거품이 된 거쥬.”

불과 1년 사이 문의면의 처지는 크게 달라졌다. 대통령 전용 별장 청남대가 지어지면서 문의면은 상수도보호구역이자 군사통제구역으로 묶였다. 문의면은 ‘동양 최대 유원지’에서 ‘빚더미에 앉은 마을’로 신문 지면에 소개됐다. 그때 당시 문의면에서 청남대 때문에 망했다는 사람들의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별장을 짓고 싶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국가 정책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다. 동양 최대 유원지를 꿈꾸던 김태화 씨는 한순간에 재산을 날려 먹었다.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별장을 짓고 싶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국가 정책이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었다. 동양 최대 유원지를 꿈꾸던 김태화 씨는 한순간에 재산을 날려 먹었다. 불과 1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 계희수·김다솜 기자

 

백골단이 쓸고 지나간 자리 

김기정(57, 당시 문의면 미천리 주민) 씨도 그랬다. 택시회사를 운영했던 김 씨는 젊은 사장이었다. 삼엄한 경비에 문의면을 찾는 사람은 없었다. 개발이 금지된 마을에서 사람들은 빠져 나갔다. 김 씨의 택시회사 수입은 바닥을 쳤다. 그는 문의면 번영회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문의면 생존권 추진 위원회 활동을 시작했다.

  • “우리 모두는 내일을 생각하며 대책 없는 융자까지 얻어서 우리에게 어울리지도 않는 이층집에 호화주택을 지었습니다. 늘어가는 이자에 막혀버린 수입에도 우리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참아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중략) 청남대로 인해 우리의 생존권은 무시된 채 찬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빚은 늘어가고 마땅한 수입은 없고 애들은 그런 어른들을 보며 커가고 있습니다.” - 1988년 7월 29일 문의면 생존권 추진 위원회(이하 추진위)

문의면 내 젊은 사람들을 모아 제대로 싸워보자고 설득했다. 그렇게 250여 명의 문의면 주민들이 미천리 삼거리로 모여 들었다. 이들은 청남대를 철폐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보상해달라고 요구했다. 마을 청년들은 진압대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맨몸에 기름을 바른 채 나타났다.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제 손가락을 벴다. 뜨거운 피가 새하얀 종잇장 위로 뚝뚝 떨어졌다. 청년들은 혈서를 펼쳐 보였다. 

“우리의 뜻이 관찰될 때까지 투쟁!” 

백골단이 추진위 앞을 막아섰다. 키 180cm가 훌쩍 넘는 장신의 사내들이 방패와 단봉을 들고서 주민들을 노려봤다. ‘탕’ 소리와 함께 희뿌연 연기가 청년들을 덮쳤다. 최루탄이었다. 독한 연기를 맞은 주민들이 비틀거렸다. 곧바로 곤봉이 날아들었다.

백골단의 진압 과정은 살벌했다. 주민들이 면사무소 2층 회의실을 점거하자 백골단이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창문 밖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 문의지
백골단의 진압 과정은 살벌했다. 주민들이 면사무소 2층 회의실을 점거하자 백골단이 무자비하게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창문 밖으로 뛰어든 사람들도 있었다. ⓒ 문의지

 

백골단은 주민 대표로 나선 청년들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백골단 무리가 방패로 청년들을 가뒀다. 울음 섞인 비명이 들려왔지만 백골단의 방패에 가로 막혔다. 방패 사이엔 손 하나 뻗을 틈조차 없었다. 보다 못한 노인들이 농기구를 들고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노인들은 곡괭이와 쇠스랑을 백골단에게 들이밀었다. 그렇게 문의면은 어두운 시절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제는 띄울 수 없는 배 한 척 

싸움 끝에 문의면이 얻은 건 두 가지였다. 문의면 일대 조경 환경 작업과 피해 주민 자녀들을 위한 10억 원의 장학금.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씨로 인한 피해는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 빚은 시간이 해결해줬지만 가슴 속 응어리는 남았다. 

“그때는 500만 원 돈 좀 넘었어. 땅 몇 마지기 샀을 돈이제. 이젠 썩고 있는데 어떡햐. 다른 사람은 그때 다 팔아서 얼마씩 돈을 건졌는데 우리는 그냥 (이 보트) 띄워본다고 내비 뒀어. 볼 때마다 가슴 아프네.” 

김기정 씨의 어머니 왕신자 씨(80, 문의면 미천리 주민)는 포도밭 옆에 누워있는 보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트 표면은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졌다. 가족의 희망은 낡아가는 보트처럼 세월 속에 부서지고 있었다. 

과거 전두환 씨가 사용하던 보트. 지금 청남대 대통령기록관 별관에 전시돼있다. (좌) 왕신자 씨가 땅 몇 마지기 값으로 구입한 보트는 이제 더 이상 호수 위에 띄우지 못한다. (우) ⓒ 계희수·김다솜 기자
과거 전두환 씨가 사용하던 보트. 지금 청남대 대통령기록관 별관에 전시돼있다. (좌) 왕신자 씨가 땅 몇 마지기 값으로 구입한 보트는 이제 더 이상 호수 위에 띄우지 못한다. (우) ⓒ 계희수·김다솜 기자

 

오래 전부터 대청호는 낚시로 유명했다. 그러나 청남대가 들어선 뒤로 대청호에 배를 띄울 수 없었다. 대청호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 나가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밥줄이 끊겼다. 그물을 접고 다른 생계를 찾아 나섰다. 꼬마아이가 대청호에서 낚시를 해도 군인들은 총을 들이밀며 낚싯대를 모조리 뺏어갔다. 

대통령만이 대청호에 배를 띄울 수 있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청남대 안에 보트 선착장을 지어 대청호를 독차지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청남대를 국민들에게 개방하면서 그들의 호화스러운 취미 생활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전두환 씨가 대청호에서 뱃놀이를 즐겼을 때 사용한 보트와 요트는 그때 그 시절 색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청남대 대통령기록관에 걸려있다. 문의면 주민들이 겪었던 고통은 청남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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