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잃어버린 역사 ‘마한’, 송절동에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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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의 잃어버린 역사 ‘마한’, 송절동에서 보다
  • 최현주 기자
  • 승인 2019.05.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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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정통성 잇는 韓 뿌리 확인
마한 생활상 알 수 있는 유물 발굴
청주 테크노폴리스 일반산업단지 확장부지 내 유적<사진제공 : 충북대 성정용교수>

 

충북 청주에는 과연 언제부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청주의 역사는 백제시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980년대 발굴된 신봉동 백제고분군을 통해 3~5세기경 청주에 강력한 철기세력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반해 백제시대 이전, 즉 마한(원삼국)시대 청주의 역사는 사실상 공백상태였다.

마한시대 중심지는 한강이남 경기, 충남, 전라도 지역으로 충북의 마한역사는 사실상 전무했던 것.

1989년 청주공업단지 우회도로 건설 과정에서 발굴된 고분을 통해 일부 청주의 마한과 백제초기의 역사를 가늠할 수 있었지만 마한의 역사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다면 백제시대 이전인 마한(원삼국) 시대의 청주, 당시 청주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하며 살았을까?

송절동, 외북동, 화계동 일대의 송절동 유적은 이 질문에 답을 준다. 이른바 ‘역사의 미아’로 일컬어지는 마한, 청주의 마한을 볼 수 있는 증거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고고학자들은 이런 점에서 송절동 유적이 대단히 큰 의미를 지닌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16년 청주 송절동 테크노폴리스 1차 부지 발굴에 직접 참여했던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성정용 교수의 설명을 빌어 청주의 마한을 유추해본다.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마한

학자들에 따르면 마한은 고조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나라다.

진(晋)나라 진수가 3세기 말에 저술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은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로 AD 6세기까지 그 존재가 확인되고 있다.

마한, 변한이 생기기 이전 중국의 연나라(현재 북경)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쫒겨난 고조선의 준왕이 지금의 완주로 와서 한을 설립했다. BC 2세기 초 준왕은 韓(한)땅에 와서 스스로 왕을 칭하였고 이때 한씨(韓氏)성이 생겼다.

AD 1~3세기 백제는 마한의 작은 나라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54개 부족국가의 흔적은 경기, 충남, 대전, 전북과 전남에서 다수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청주에서 마한의 역사는 찾기 어려웠다. 

마한 부족국가에서 청주지역이 빠져 있다.<제공 충북대 성정용 교수>

 

학계에 따르면 마한의 중심지는 전북 완주로 꼽힌다. 완주는 고조선 준왕이 내려와 정착했던 곳으로 신풍유적에서는 세문경(청동거울), 토기, 마한의 무덤(토광묘) 등이 대거 발굴됐다.

 

타 지역과 활발한 교류하며 정착

그동안 충북에서 마한의 역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러던 중 지난 2014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청주 테크노폴리스 산업단지와 흥덕구 오송읍 봉산리 ‘제2생명과학단지’ 부지 내에서 마한의 유물이 대거 발굴됐다.

오송지역에서는 발굴된 무덤은 토광묘로 능선을 따라 깊이 150cm, 너비 350cm의 도랑을 중심으로 좌우로 170여 기가 질서정연하게 나뉘어 있었다.

짧은목항이리와 검은간토기, 쇠창, 청동마형대구, 백합조개와 피뿔고등, 생선뼈 등은 금강을 이용해 서해안까지 활발한 교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송절동 일대에서는 2~5세기 마한시대의 충북 집단 주거지와 무덤(토광묘), 생활시설인 철기 공방 등 수백 개의 유물이 대거 출토됐다.

 

송절동유적 시대별 출토유물 일람표<제공 충북대 성정용 교수>

 

이중에는 BC3~AD2세기 유물로 추정되는 점토대토기를 비롯해 500여기가 넘는 수혈주거지와 유구, 30여기의 제련유구 등이 있다.

완주 유물에 능가하지는 못하지만 세형동검, 토기 등이 있었다는 것은 청주에도 마한의 세력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테크노폴리스 1차 발굴지역에서 출토된 철검은 중국 길림지역의 유물과 유사하고 꼬지 않는 재갈의 제작기술은 아시아 전역에서 확인된다. 그만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외에도 적석묘, 목관묘, 합장묘, 제철노 및 폐기장 등은 당시 청주가 자체적인 세력권으로 여러지역의 문화를 유기적으로 받아들이며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의 미아’로 불리던 청주 마한의 흔적이 드러난 셈이다.

충북대 성정용 교수는 “마한의 54개 부족국가에서 청주가 빠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추정된다. 기록하는 사람이 청주를 잘 몰랐거나 아니면 정말 청주가 마한의 영역이 아니었거나. 하지만 첫 번째 원인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마한시대 청주의 송절동, 오송, 오창에는 큰 읍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대한 중심지, 즉 국읍까지는 아니더라도 큰 읍락이었던 것은 틀림없다”며 “청주가 마한부터 백제로 이어지는 전통과 역사가 있는 도시라는 것을 송절동과 오송 유적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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