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죽음,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로 희생
두 번째 죽음, 청주시 무관심속 유해 터 훼손돼

 문(일제경찰) : 어째서 조선독립운동을 할 마음이 생겼는가.

답(홍가륵) : 그것은 일시 작심이 아니라, 오랫동안에 걸쳐 조선을 독립시켜야 하겠다는 당위성이 내 자신의 심정으로 온양되었으므로 그 경위를 진술하겠다.

전술한 바도 있지만, 우리집은 조부 시대부터 기독교에 열중 귀의한 관계로 나도 유년 시절부터 성서를 배웠다. 유년 시절은 그저 가르침을 맹목적으로 익히고 있다가, 철들 무렵이 되고서는 자신이 사회적으로는 불우한 처지임을 알았고, 이어서 일본인이나 외국인들이 윤택한 생활을 하는데, 반대로 조선민족대중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불우한 처지에 있음을 깨달았다. 이 부자연한 사리를 깊이 궁리해 본 결과 조선민족이 그러한 불리한 지위에 있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탓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싹터오고부터는 성서를 공부해도 그 때까지는 그저 정신적 하늘나라를 설교하는 것으로 교리 그대로 순종하며 해석했으나, 그 뒤로는 현실사회에 비추어서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馬太」 「馬可」 「누가」 「요한」의 四복음 중 아마 「마태」의 어느 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 있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하는 구절에서 교의의 실제는 그 나라 즉 「천국」의 뜻, 즉 「대의명분」을 구하여라. 「그러면 사람 세상의 만사는 해결되리라」라고 한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것은 조선의 현상에 비추어 조선민족은 지상천국을 먼저 건설함에 있어서 빼앗긴 조선국을 탈환 독립케 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이것이 나의 조선에 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조짐이었고, 그것은 내가 培材고등보통학교 二·三학년생 때의 일이었다. (홍가륵의 일제경찰신문조서 중에서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의열단원 홍가륵이 부른 三一 추도가 >

가삼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 / 가삼에서 솟는 피는 푸른 풀에 즐벽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우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만리전장 외로운 몸 부모형제 이별하고 / 홀로 섰는 나무 밑에 힘이 없이 쓰러져

나의 사랑 조선 혁명 피를 많이 먹으려나 /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라

(홍가륵의 일제경찰신문조서 중에서 /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이승만 정부 민간인 학살 당시 희생된 홍가륵 선생
14일 홍가륵 선생의 아들인 홍우영씨를 비롯해 한국전 당시 이승만 정부의 민간인 학살로 희생된 유족들이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유해터 훼손에 항의했다.
지난 3월부터 시작된 사방댐 공사로 의열단원 홍가륵 선생이 뭍힌 곳으로 추정된 유해터가 훼손됐다.

“만리전장 외로운 몸 부모형제 이별하고 홀로 섰는 나무 밑에 힘이 없이 쓰러져! 나의 사랑 조선 혁명 피를 많이 먹으려나. 피를 많이 먹겠거든 나의 피도 먹어라”

그가 즐겨 불렀을 노래말 처럼 한 독립운동가의 피는 두 번이나 제물이 되어 뿌려졌다. 그것도 죽도록 꿈꿨던 독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다.

22살 꽃다운 나이에 의열단에 가입해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해 독립투쟁에 나섰던 홍가륵( 洪加勒, 1913년 출생) 선생.

2009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애족장을 수여받았지만 그의 무덤은 다시 한번 파헤쳐졌다.

지난 3월 말 시작한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사방댐 건설공사와 간벌작업으로 훼손된 장소에 의열단원 홍가륵 선생의 유해가 묻혀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청주시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 산 22번지 도장골은 1950년 7월 초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 및 보도연맹원 등 100여 명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돼 묻혀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야트막한 봉분 3개가 이어져 있다. 각각의 봉분은 개인 무덤이 아니다. 1950년 7월 대한민국 군경은 당시 청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재소자를 이곳으로 끌고 와 집단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1950년 7월 2일부터 충북지구CIC의 지휘 아래 제2사단 16연대 헌병대와 기동대를 중심으로 한 충북도경찰국과 청주경찰서 경찰 등은 청주형무소 전체 재소자 중 절반 이상인 800명의 정치범을 청주시 낭성면 도장골, 남일면 분터골, 남이면 화당리, 가덕면 공원묘지로 끌고 가 총살했다.

'북한군이 남하하면 빨갱이(형무소 재소자)들이 인민군에 협력할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에 의한 예방학살이었다.

의열단원 홍가륵 선생은 왜 희생자가 되어야 했을까? 홍가륵 선생은 1946년 2월 미군정청후생부에서 주관한 수의사시험에 합격하여 진천군청에 근무했다. 그러면서 여운형이 주도한 근로인민당에서 활동했고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홍가륵 선생은 1948년 말경 충북 진천군 이월면에 발생한 시국사건에 연루됐다. '소요, 상해치사, 상해'죄로 4년을 선고받았다. 선고재판이 1949년 4월 20일 있었고, '구속되어 재판받은 100일을 감(減)한다'고 결정했다. 1953년 1월 초에는 자유의 몸이 되어야만 했지만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야만적인 학살을 피하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 민간인 학살의 희생양된 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의 공훈록에 따르면 홍가륵 선생의 본적은 충남(忠南) 아산군(牙山郡) 온양면(溫陽面) 온천리(溫泉里) 97이다. 홍가륵은 1933년 9월 중국 남경(南京)에서 의열단(義烈團) 가입과 동시에 조선혁명간부학교(朝鮮革命幹部學校)에 입학해 1935년 4월 졸업했다.

의열단은 1919년 만주 길림(吉林)에서 약산 김원봉(金元奉) 선생을 주축으로 창립돼 중국관내와 국내, 일본을 주 무대로 활동하였다. 1920년대에는 강도 높은 암살 파괴활동으로 의열투쟁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으며, 의열단의 ‘의열’은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 한다”는 공약 제1조의 문구에서 비롯됐다. 또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중국 남경에서 의열단이 비밀리에 운영한 한인 독립군 간부양성학교로 3년 동안 120명의 간부를 양성하여 독립운동에 기여한 교육기관이었다.

조선혁명학교에서 홍가륵은 정치교육, 정신교육, 군사교육을 받았다, 군사교육의 역점은 법령·군사지식·정보·폭파·전술 등 각종 군사기능 숙련에 있었다.

1935년 홍가륵 선생은 동지 규합을 위해 국내로 잠입(潛入)해 평양과 서울에서 활동하다 같은 해 5월 중순 일제경찰에 체포(逮捕)돼 징역 3년을 받았다.

홍가륵 선생이 독립운동과 의열단에 투신하게된 계기는 신앙이었다. 홍가륵 선생의 조부 홍승하(1863년생)와 아버지 홍형준(1888년생)은 대를 이어 감리교 목사를 했다. 홍가륵 선생은 당연히 모태신앙 소유자였다.

홍가륵 선생은 일제경찰에 체포된 뒤 받은 신문조서에서 독립운동을 하게된 경위에 대해 성경이라고 답했다. 홍 선생은 “깊이 궁리해 본 결과 조선민족이 그러한 불리한 지위에 있는 것은 나라를 빼앗긴 탓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싹터오고부터는 성서를 공부해도 그 때까지는 그저 정신적 하늘나라를 설교하는 것으로 교리 그대로 순종하며 해석했으나, 그 뒤로는 현실사회에 비추어서 성서의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馬太(마태) 馬可(마가), 누가, 요한의 四(4)복음 중 아마 「마태」의 어느 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중에 있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하는 구절에서 교의의 실제는 그 나라 즉 「천국」의 뜻, 즉 「대의명분」을 구하여라. 「그러면 사람 세상의 만사는 해결되리라」라고 한 것이다. 나는 이 구절에 대하여, 이것은 조선의 현상에 비추어 조선민족은 지상천국을 먼저 건설함에 있어서 빼앗긴 조선국을 탈환 독립케 해야 한다고 해석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것이 나의 조선에 대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조짐이었고, 그것은 내가 배재(培材)고등보통학교 2·3학년생 때의 일이었다”고 진술했다.

“「너희는 먼저 나라와 의를 구하여라」 운운의 자구는 신약전서의 어디에 있는가?”라는 일제 경찰의 질문에 “마태전 6장 33절 후단에 있다”고 당당하게 답했다.

 

“개전의 가망없다” 일제경찰도 혀 내둘러

 

의열단원 홍가륵 선생에 대한 일제경찰의 판단은 어땠을까? 홍가륵 선생을 취조한 조선총독부 경기도경찰부가 작성한 ‘소행조서’에는 홍가륵 선생에 대해 “표면상으로 온순을 가장하나, 극히 음험 교활하다”고 기록했다.

‘개전 가망성의 유무’ 기록란에는 “개전의 가망 없음”이라고 적었다.

홍가륵 선생의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는 일제 경찰의 신문조서에도 그래도 나타난다. 일제 경찰이 홍가륵 선생에게 “현재는 어떤 생각으로 있는가?”라고 물었다.

홍가륵 선생은 “나는 신념에 대해서는 결코 의열단(義烈團)을 배신하기 싫다. 몸만 건강해진다면 반드시 스스로 실천할 결의와 각오는 견고하여 동요할 수 없다”고 답했다.

다시 일제 경찰이 “그럼 건강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공작을 진전시킬 작정이었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홍가륵 선생은 “나는 현재의 국제 정세는 1935·1936년의 위기에 즈음해 있다. 세계대전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기도래 한다면 먼저 군수품 제조공장을 파괴할 것”이라고 답했다.

두 번째로 “반전쟁 운동을 실천, 대중에 반전쟁 삐라의 배포, 기타 선전을 행하여 반전쟁 분위기의 양성 격화를 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 번재로 “후방 교란을 실천키 위해. 군대 군수품 수송 방해를 위해 교량, 철도를 파괴, 폭파한다. 통신기관망 파괴를 위해 전선, 전주의 절단. 정치기관의 파괴를 위해 관청을 습격, 폭파할 것. 등을 실행하고, 궁극 목적인 日本제국주의를 타도하기까지 진척시킬 작정이다”고 답했다.

 

유해발굴은커녕 무덤까지 훼손한 대한민국과 청주시

 

의열단원 홍가륵 선생의 아들 홍우영씨.

한국전쟁 당시 발생한 민간인 학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위원회는 2010년 홍가륵 선생이 이승만 정부하에 자행된 민간인 학살의 희생자라고 공식 인정했다. 또 홍가륵 선생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시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 지역에 대한 유해발굴을 권고했다.

이보다 앞서 2009년 국가보훈처도 홍가륵 선생의 공적을 인정해 애족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유해발굴 조사도 진행되지 않았고 무덤은 방치됐다. 급기야 지난 3월 이곳에서 진행된 사방댐 건설과정에서 유해터가 집단 훼손됐다.

허가권을 가진 청주시와 시행기관인 산림조합도 서로 책임이 없다고 떠넘기고 있다.

14일 유해터 훼손 사실을 안 청주형무소 민간인 학살 유족회는 낭성면 호정리 도장골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홍가륵 선생의 아들 홍우영씨는 이렇게 말했다.

"독립운동을 하다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아버지가 이곳에서 돌아가신 이후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라도 청주시가 유해발굴에 나서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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