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이경식, 단양팔경 사인암에 이름 새겨단양‧진천‧괴산‧옥천군수…중추원 참의까지 올라이경식 동생…육영수 부친 육종관에 사기쳐 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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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군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인암에는 200여개의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이중 정말로 이곳에 이름이 남아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반민족행위자 이경식(李敬植, 1983~1945)입니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리에 소재한 사인암 전경

 

충북 단양군은 연간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는 고장입니다. 굽이굽이 산줄기를 휘감아 흘러가는 남한강 장회나루에서 바라보는 구담봉과 가을 단풍, 소백산의 철쭉 등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움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수 있겠습니까?

단양의 아름다움은 단양팔경으로 압축됩니다. 요즘은 단양읍내에 있는 재래시장을 더해 ‘단양구경’이라고 부릅니다.

단양팔경이 하나인 사인암은 단양군 대강면에 자리잡아 있습니다. 해금강을 연상케 하는 깍아지른 석벽은 보는 방향에 따라 부처님의 형상을 띄기도 합니다.

사인암의 아름다움은 ‘하늘이 내린 그림’에 비유됩니다. 추사 김정희는 “속된 정과 평범한 느낌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없다”며 하늘이 내린 그림이라고 감탄했습니다.

하늘이 내린 그림이니만큼 당대 화가들의 발걸음을 붙잡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보물’ 이라는 뜻의 김홍도의 화접 ‘단원절세보(檀圓折世寶)’에는 그가 그린 사인암도(舍人岩圖)가 들어있습니다.

 

“구름꽃 같은 바위에 함부로 이름을 새기지 마라”

 

有暖芬盡(유난분진) 有色英(유색영) : 따스한 향기는 극에 달하고 색 또한 영롱한데

雲華之石(운화지석) 愼莫鐫名(신막전명) : 구름꽃 같은 바위에 함부로 이름을 새기지마라

충북 단양군 대강면 사인암에 새겨진 친일파 이경식의 각자

조선후기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이 사인암 운화대(雲華臺)에 새긴 글입니다. 구름같은 바위에 이인상 자신도 각자를 남겨놓으면서 “함부로 이름을 새기지마라”고 했으니 조금은 앞뒤가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인상의 일침에도 불구하고 사인암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글이 남겨져 있습니다. 이 외에도 바둑판과 장기판까지 새겨 있기도 합니다.

단양군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사인암에는 200여개의 각자가 남아 있습니다. 이중 정말로 이곳에 이름이 남아있지 말아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까지 지낸 반민족행위자 이경식(李敬植, 1983~1945)입니다.

“군수(郡守) 이경식(李敬植) 大正(대정) 4년(四年) 11월(十一月)”

‘대정’은 일제가 쓰던 연호로 1915년에 해당합니다. 이경식이 단양군수로 있던 11월 이곳 사인암을 찾아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입니다.

 

중추원 참의까지 오른 거물 친일파 이경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이경식은 1983년 충북 보은군 삼승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그의 원적은 충북 제천군 수산면으로 돼 있습니다.

이경식은 대한제국의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가 되고 이듬해 서기로 진급합니다.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합병하면서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급기야 1913년 조선총독부의 단양군수로 임명됐고 1915년 12월에 괴산군수가 됩니다. 이후 충주군수와 진천, 옥천군수를 연이어 지냅니다.

1930년 6월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오를수 있는 최고 자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선임됩니다.

중추원 참의에 오른 거물친일파인 만큼 이경식은 2009년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돼 있습니다.

위원회가 이경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이경식은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5년 2개월 동안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군수로서 15년을 재직하며 일제로부터 훈6등, 훈5등의 서보장을 받았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협력하여 포상과 훈공을 받은 것입니다.

이경식은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는 시문과 조선인 청년지원병 지원을 선동하기도 했습니다. 일제는 성균관을 경학원으로 재편했는데 이경식은 사성(현 대학총장)으로 있으면서 ‘황도유학’을 주장하고 시국강연을 했습니다.

경학원의 최고 지위는 대제학이지만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간부가 바로 ‘사성’입니다.

‘황도유학’은 일본국왕이 정점에 있는 신도(神道)와 육교가 결합돼 충효일치의 일본화된 유교입니다. 또 일본의 침략전쟁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해 조선의 유림에게 자발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경학원에 참여한 인물들은 일왕과 태자를 칭송하는 시문을 바칩니다. 이경식은 조선의 청년들이 일본 제국주의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나가는 징병제를 축하하는 한시(漢詩)까지 발표합니다.

이것도 모자라 그의 부인까지 ‘애국금차회’라는 친일여성단체에 참가시킵니다.

이경식이 1948년까지 살았다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경식은 1945년 사망했기에 어떠한 단죄도 받지 않았습니다.

다만 2008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하 특별법)」에 의해 후손에게 물려준 보은군 소재 2만688㎡의 토지가 국가에 귀속됐습니다.

 

형은 친일파! 동생은 사기꾼, 그리고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

 

이경식과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동생이 사기를 쳤는데 육영수의 부친 육종관과도 연관이 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1915년 5월 30일 발행된 매일신보 <군수의 동생은 감옥에>라는 기사에 소개됐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충북 보은군에 사는 이상곤이라는 사람이 이경식의 동생 이동식과 함께 금융조합에서 돈을 빌립니다. 나중에 이상곤은 이동식에게 자신이 금융조합에 갚아야 할 돈을 건넵니다.

돈을 받은 이동식은 금융조합에 갚지 않고 자신이 써버립니다. 한마디로 횡령을 한 것이지요.

그러자 금융조합에서는 이상곤을 포함한 채무자에게 지불명령을 내립니다. 그러자 이상곤은 이경식과 이동식의 모친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합니다.

이경식의 모친 신현은 가진 것은 이경식의 이름으로 돼 있는 땅문서 밖에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경식과 이동식의 일가인 이준식이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준식은 이경식의 땅과관련해 문권을 위조해 육종관(陸鐘寬)에게 돈 200원을 빌려 씁니다.

여기서 육종관은 육영수의 아버지입니다. 매일신보는 이런 사실이 나중에 들통났고 이경식의 동생 이동식과 이준식 모두 징역형을 받았다고 소개합니다. 매일신보에 따르면 당시 이경식은 문권 위조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부인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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