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음을 행하는 것이며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을 행하는 것이다.” (루가 16, 18)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줄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는 자신이 사랑해줄 여자를 사랑한다. 하여 여자는 첫사랑을 털어버리고 다른 사랑을 찾지만, 남자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다른 사랑을 찾는다. 하고보면 변신에 능한 여자보다는 과거에 연연해하는 남자가 더 순정적이고 바보스럽다 할 수 있겠다. 누구나에게 통용되는 말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많은 남녀에게 이 말은 적용될 듯싶다.

이항규(69·스테파노) 씨가 부르는 연가戀歌는 미움조차 정情으로 남는다는 속말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다. 애절했지만 행복했고, 행복했지만 고통스러웠던 사랑.이제 고희의 나이에 들어서는 이씨에게 자신의 연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 아니면, 작은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우리들에게 그의 연가는 어떤 의미로 해석 되어야 할 것인가.이씨의 고향은 황해도 송화였다.모친은 일찍 작고한 탓에 기억에 없고 포목상을 하며 제법 규모있는 살림살이를 꾸려나가던 부친은 일제 때 징용을 간 까닭에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때, 암울했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험난한 삶의 여정을 거쳐오지 않았던 사람이 몇 있겠는가만은, 이씨는 졸지에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고아가 됐다.“충남 서천에 외가가 있었어요. 그쪽 사정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여서 외삼촌께서는 징용가시고 외숙모 혼자 줄줄이 딸린 외사촌들과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지요. 부친 밑에서 일을 하시던 동네 분이 우리 가게를 처분한 돈을 갖고 우리를 외가에 데려다주었는데, 견물생심見物生心 아니겠어요? 상당한 돈을 그분이 우리에겐 한 푼 주지 않은채 몰래 도망가버린 거예요. 가장 없는 집에 두 남매 얹혀 산다는 게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죠.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 먹을 것 입을 것 모두 풍족할리 없었죠. 여섯 살에 가서 열 여섯에 나왔으니 꼭 10년을 외가에 기대 살았던 셈이죠.”어린 이씨의 외가살이는 노동이었다. 풀 베어 소 먹이고, 나무 베어 군불 때고, 논 밭 가는 일들에 어린 이씨는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해방이 되고 호열자가 창궐했는데, 그때 네 살 위였던 누이는 호열자로 사망했습니다. 하고보니 이젠 더 이상 외가에 있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열 일곱 살에 군대에 자원입대하게 됐습니다.”열 일곱 살이면 연령 미달로 군 입대가 불가능했다. 해서 이씨는 월남민들 관리장부에 자신의 나이를 18세로 고치고 군에 들어갔다. 그러나 워낙 체격이 왜소한 데다 얼굴이 동안이라 군에서 쉽사리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가 자원입대하려 한 곳은 육군항공대였다. 당시엔 공군이 없고 대신 육군 산하에 항공대가 있었다. 육군항공대는 1년 뒤 공군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 곳 교관이 입대하려는 이씨에게 말했다.“야 임마, 넌 너무 작으니까 그냥 집에 가!”“갈 데가 없습니다, 교관님. 군생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군대 생활을 하면 입고 먹고 자는 것은 해결되기 때문에 생활 방편으로 이씨는 입대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는 이씨에게 교관은 승낙 대신 기합을 주었다.“그때가 1949년 7월 18일이었어요. 여름철 한낮 뙤약볕이 얼마나 지독합니까? 그런데 외투까지 입히고 완전군장에 일본 장총 들게 하고, 속피없는 철모를 씌워서 연병장을 돌게 만들더군요. 뛸때마다 덜컹덜컹 철모가 머리에 부딪혀 온통 혹투성이가 됐죠. 그래도 악착같이 일곱 시간을 뛰었어요. 나중엔 교관이 두 손 들며 그러더군요. ‘허헛 참, 독한 녀석. 그래 한 번 해봐!’ 그래서 8주간의 훈련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요.”이씨는 육군항공사관학교(현 공군사관학교) 교장 당번병으로 차출됐다. 장작 패고, 물 긷고, 시장 보고, 사모님 고무신 닦는 게 그의 일이었다. 군인이 아닌 군인생활이었다. 그렇게 5년을 당번병 생활만 했다.“너무 일을 잘 하니까 안 놓아주더군요. 이듬해 6.25가 터지면서 공군이 창설됐는데, 조종사가 출격만 한 번 하고나면 소위에서 중위로, 중위에서 대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저도 스물 여섯에 상사 계급을 달았습니다. 남들보다 빠른 진급이었죠. 김정렬 대령과 최용덕 장군을 모셨었고, 부산 중앙보급창에서 주임상사로 근무했어요. 20년 군생활을 접고 전역한 것은 69년도였죠.”그에겐 남모를 사랑이 있었다.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는 문관文官인 타이피스트 여자였다. 고운 얼굴의 그녀를 볼 때마다 이씨는 남 몰래 얼굴을 붉히곤 했다.“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 했던가요? 속 마음을 털어놓고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분위기가 됐다 싶었는지 그녀가 하루는 자신의 아버지를 한 번 만나보라 하더군요. 그래서 부산엘 내려갔습니다. 그녀의 집안은 교육자 집안이었는데, 아버님은 꽤 보수적이고 엄격하신 분이더군요. 처음 절 보시고는, ‘자네 본本官이 어딘가?’ 묻더군요. 사실 전 그때까지 제 본이 어딘지 알지 못했고, 본이라는 게 있는지 조차 몰랐어요.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러시더군요. ‘자네처럼 근본도 모르는 사람에게 내 딸을 줄 수는 없네.’ 어찌합니까? 그냥 나오는 수밖에요. 그때까지 전 제 근본도 모르는 막돼먹은 사람으로 그들에게 비춰졌으니까요.”그리고 1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긴 시간 속에서도 이씨는 그때의 첫사랑을 잊지 못해 결혼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떠오르는 해사한 그녀의 얼굴을 그려보는게 가장 행복한 일이기도 했다.이제 서른일곱의 나이. 잊을 만한 세월도, 잊을 만한 나이도 됐건만, 그녀의 얼굴은 인화되기를 기다리는 필름처럼 그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정말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됐다.“경희대학교 수위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어요. 돈도 제법 있었고 서울 명륜동에 번듯한 집 한 채도 갖고 있었죠. 11년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혼자가 됐다 하더군요. 더 생각해볼 게 없었어요. 난 아직도 당신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나와 같이 살자. 그녀도 11년만에 만난 저에게 그런 말을 기대했던 듯싶더군요. 결혼하지 못했던 지난 기억이 밉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게 그저 반갑고 신통하고 행복했습니다. 살림을 차리고 8개월쯤 됐을까, 직장을 다녀왔는데 모르는 남자가 제 집에서 술 먹고 취한 얼굴로 기다리는 거예요. 누구냐 물었더니 그녀의 남편이라는 겁니다. 남편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저로선 충격이었죠. 그래서 그녀의 남편에게 그럼 데려가라 했지요. 헌데 얼마 후 파출소에서 순경이 와서 말하길, 간통죄로 고소 당했다는 겁니다. 법원서 사실대로 이야기 했고, 인정이 됐는데도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어요. 기막히더군요. 그래서 수원교도소를 한 번 갔다온 적이 있지요.”당혹스런 마음을 추스릴 겨를도 없던 차에 이번엔 그녀가 아예 자신의 딸아이 하나를 데리고 그에게로 왔다. 감쪽같이 자신을 속인 그녀의 처사가 밉기도 했지만, 딸 아이 데리고 갈 데 없어 찾아온 그녀를 박정하게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보다도 그는 그녀를 너무 사랑하고 있었다.“그런데 제 집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딸아이 하나가 아니었어요. 그때 장인은 이미 작고 하시고 가계가 기울어 그녀 가족들이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됐었거든요. 장모님과 처남 둘이 같이 들어와서 처가 식구들을 모두 모시게 되는 꼴이 됐죠. 당시 전 가락동시장에서 개풍상회라는 과일 도매업을 하고 있었는데 벌어들이는 돈이 꽤 되는데도 늘 생활비가 쪼들리는 거예요. 처남들 용돈을 저 몰래 아내가 주기 때문이더군요. 나는 아내에게 사랑을 받는 남편이 아니라, 제 때 돈 갖다주는 기계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제 식구들만 건사하는 아내와 그래서 갈등도 많았죠.”이씨는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살기 위한 팔자려니 치부했다. 아내는 그때부터 여러가지 계를 하고 있었다. 계주로 일수 월수를 하며 제법 돈도 만지는 듯 보였다. 따라서 밖으로 나도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웃들은 이씨에게 ‘집 단속 잘하라’는 언질까지 주었지만 그녀는 집안보다는 밖의 시간을 좋아했다. 그녀가 계주로 있는 계들도 하나 둘 깨지기 시작하고 뭉텅이 돈이 빠져나갔다. 불길한 조짐이었다. 게다가 큰 처남의 주사酒邪 또한 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그는 가족회의를 열었다. 그리고는 내 식구만 남고 모두 나가라고 선언했다. 집은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그러자 작은처남이 도와달라고 했다. 고시공부를 하겠다는 거였다. 이씨는 거절할 수 없어 작은처남의 고시 뒷바라지를 7년간 했다.“고시원, 절 등 안 가본 데가 없었어요. 책값이 엄청났지요. 인삼에 꿀, 고급 담배, 고급 술, 좋은 고기, 끊임없이 들어가는 돈, 돈…… 딸아이는 대학에 들어가 현대무용을 배웠는데, 레슨비니 음악 편곡비니, 책값이니, 그 애한테 들어가는 돈도 한정이 없더군요. 꼼꼼이 적어보니까 딸아이가 같은 제목의 책값으로 우려내는 돈이 세 탕이나 되더군요.”그래도 집안에 경사가 나서 작은처남이 7년만에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집안에 율사律師가 한 명 나자 그때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일가친척들이 하나 둘 아는 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남도 변하기 시작했다. 사법연수원에서 나오는 돈이 30만 원인데 씀씀이는 100만 원을 넘었다. 그 부족분은 고스란히 이씨의 호주머니에서 충당됐다.“창원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는데, 제가 절반을 부담했어요. 그런데 그러고 나니까 남이 되더군요. 큰처남은 허구헌 날 술 먹고 술값 내놓으라 전화나 하고.”이씨는 그때까지 자신을 위해 돈을 투자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늘 처가 뒤치다꺼리를 하다 못 먹고 못 입고, 정신적인 고통을 당했노라 했다. 그런 생활에서 이씨가 덜컥 몸져 누웠다. 결핵이었다. 마산서 그는 결핵요양원 생활을 했다. 그런데 한 사람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아내까지 마찬가지였다.결핵요양원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집으로 왔을 때 그의 눈앞엔 믿기지 못할 일이 벌어져 있었다. 아내가 골수암으로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내는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한 것이었다. 처음엔 오른쪽 무릎 밑을 절단했다. 허벅지까지 잘라내야 한다는 의사의 강력한 권고가 있었지만 아내는 딸 결혼식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아내는 허벅지까지 절단했다. 그렇게 아내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절름발이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3년 뒤, 잠잠했던 골수암이 이번엔 왼쪽발로 전이됐다. 왼쪽발까지 아내는 잘라내야 했다. 차라리 죽겠다고, 악을 써대는 아내를 진정시키며 이씨는 허망한 인생의 한 면을 보아야 했다. 사람이 없으면 아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아내의 입장에서는 이미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니었다. 딸은 결혼 후 미국 텍사스로 떠났다. 친정의 암울함을 딸은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고 끌어안으려 하지도 않았다.간병인에게 나가는 돈이 하루 4만원이었다. 토요일엔 추가로 할증까지 붙었다. 도무지 꾸려나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아내의 대소변 받아내는 일은 이씨의 몫으로 돌아왔다. 직장을 다녀오면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지독하게 풍겼다. 마음을 붙잡지 못하는 아내가 술에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러지 말고 정신 차려. 제발 날 더 힘들게 하지 말고.”아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더 몸이 야위어갔다. 여의도 성모병원을 찾으니, 이번엔 아내에게 폐암이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수술해도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선언이었다. 아내는 그러고도 2년 여를 더 살았다. 1997년 11월 24일, 이씨는 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가 얼마 안 남았으니 생전에 한 번이라도 찾아와 얼굴을 보라했다. 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만삭이라 못 온다는 것이었다. 이씨가 아내의 산소마스크를 떼는 날, 딸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딸아이의 전화번호는 이미 바뀌어 있었다.아내의 영안실에서 이씨는 난생 처음으로 담배를 피웠다. 답답한가 하면 허망하고, 허망한가 하면, 분노스럽고, 분노스러운가 하면 절망스럽고, 절망스러운가 하면 아무 생각이나 느낌이 들지 않기도 했다. 아내를 화장하면서 이씨는 세상살이의 냉정함을 깨달아야 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내고 이씨는 무슨 일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세상살이가 싫어졌다. 모두가 자기를 조롱하는 듯도 보였다. 잡을 길 없었던 마음에 이씨는 성당을 찾았다. 신림4동 성당 신부님께서 삶에 지친 이씨에게 말했다.“꽃동네 한 번 찾아가보는게 어떻겠어요?”1998년 8월 14일 이씨는 가평꽃동네에 자진입소 했다. 그리고 아내를 잃으면서 배웠던 담배를 2001년 5월 11일 끊어버렸다. 꽃동네 생활은 생각만큼 쉬운 것은 아니었다.“전 원칙주의자입니다. 군대생활이 몸에 밴 탓에 위계질서를 중하게 여기고 하극상을 용납 못 하죠. 모든 가족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않아요. 노인 분들께 못되게 구는 젊은 놈들 있으면 제가 그냥 안 두고 혼쭐을 내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힘든 생활이지만 이씨는 자신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한다. 꽃동네에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란다.

중환자실에서 환자들 돌보는 일을 하다가 얼마 전 세탁소 일을 맡았는데, 무거운 세탁물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했다. 그런데 가볍게 여겼던 것이 증세가 악화돼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중증 디스크였다.

“박대복 수사님의 기도 덕분이었어요. 그때까진 휠체어 신세에 밥도 엎어져서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안수기도를 받은 후 좋아졌어요. 저도 모르게 앉게 되더니, 이젠 큰 불편없이 걸어다닐 수 있게 됐지요. 수술도 안 받고 일어설 수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기적 같아요. 요즘 기도는 그래서 이렇게 드립니다. ‘불쌍한 가족들 돌볼 수 있도록 제 몸 움직임을 허락하소서.’ 처음 올 땐 제 발로 찾아왔지만 꼭 유배 당하는 느낌이었어요. 가도가도 첩첩산중, 그래서 신부님께, ‘신부님 저 유배지로 가는 겁니까?’ 했더니, 신부님께선 허허 웃으시며 ‘가 보시면 압니다’ 하시더군요. 와보니 이제 조금씩 알겠어요. 꽃동네가 왜 사랑이 피어나는 보금자리인지를.”

노인분들의 ‘반장’으로 죽을 때까지 봉사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평화의집’ 가족들이 노인분들이라 일꾼이 없어 고희를 바라보는 그이지만 수족 제대로 쓸 수 있는 몸인 자신은 큰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면서 그는 자신의 운명이 선택받아 이곳으로 오기로 내정돼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그런 소회를 쓴 ‘주님을 제 가슴으로 모시기까지 67년 걸렸습니다’라는 글은 꽃동네가족들에게 많이 사랑받기도 했다.

“아내에게 늘 고마움을 느끼죠. 뼈대있는 집 가문에서 자라나 나같이 보잘 것 없는 놈 반쪽이 되었었으니까요. 딸이야 가끔 괘씸하기도 하만 내 씨 아니고 키운 정만 있어 그러려니 하면 그만입니다. 여기서도 다리없는 분들껜 더욱 애착이 가게 됩니다. 그분들 보면 자꾸 아내 생각이 나서……”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던 아내는 자신보다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자신만 남겨두고 훌쩍 떠나갔다. 이씨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아내 이외의 여자를 몰랐다고 술회한다.

“죽기 전 아내에게 물었어요. ‘나 만나서 고생이 많았지?’ 아내가 대답하더군요. ‘다시 태어나면…… 그땐 건강한 몸으로 당신께 가겠어요. 그래서 당신 고생 덜 시키고, 당신 속도 덜 태우고, 당신과 사랑만 하면서 살래요.”

자신의 마지막 삶을 멋있게 장식하고 싶다는 이씨. 자신의 마지막 멋진 삶은 꽃동네가족들의 손발이 되어 죽을 때까지 봉사할 수 있는 몸을 허락받는 것이라는 이씨는 늘 건강해 보이는 가평꽃동네의 ‘훈육대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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