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깃발이 되어 맨 앞에서 펄럭이던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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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깃발이 되어 맨 앞에서 펄럭이던 그대”
  • 최현주 기자
  • 승인 2019.03.25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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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교육운동가 故권영국 씨 10주기 추모제 열려
김병우 교육감 비롯해 전교조 관계자 40여명 참여
고 권영국 씨 10주기 추모식이 지난 15일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 묘지에서 있었다.

 

‘권뻥’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있었다.

권 씨 성을 가진 사람이겠지. 뻥이 얼마나 심하길래 별명까지 ‘권뻥’일까?

하지만 그의 평판은 뜻밖에도 ‘허풍쟁이’나 ‘못 믿을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에 주저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하는 도전정신이 강한 사람, 옳은 일이라면 불의에 굴하지 않는 사람.

‘권뻥’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의 뿌리는 참교육세상”

권영국 선생.

전교조 충북지부 초대 지부장 또는 충북의 첫 번째 해직교사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다.

대학시절부터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한 이후 해직과 구속, 복직을 반복하다 52세라는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등진 사람.

그의 10주기 추모식이 지난 3월 23일 광주 망월동 국립 5.18 민주 묘지에서 있었다.

추모식에는 유족인 이선희 씨(전 칠금중 교사)를 비롯해 김병우 충북도교육청 교육감, 충북 전교조 관계자 40여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김병우 충북도교육감, 허건행 전교조 충북지부장, 고홍수 씨 추모사에 이어 추모시 낭독 순으로 진행됐다.

허건행 전교조 충북지부장은 추모사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각자 다르지만 우리의 뿌리는 권영국 선생님이 추구했던 참교육세상이다. 그 뿌리를 잊지 않는 것이 권영국 선생님을 진정으로 추모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병우 교육감도 추모사에서 “권영국 선생님은 어려웠던 시절에 우리에게 방향을 알리는 깃발이었다. 그의 대책없는 낙관주의는 우리를 행동하게 했고 꿈꾸게 했다.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만 있었던 시절 우리에게 힘을 주고 행동하게 했으며 우리를 꿈꾸게 했다.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우리의 현실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가 있음으로 해서 현재의 교육성과가 있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또 고홍수 씨 추모사에 이어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추모시 ‘펄럭이는 그대’의 낭독이 이어졌다.

거센 바람과 햇살 또다시 눈, 비, 바람이 오락가락했던 23일 날씨는 굴곡지고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을 반추하게 했다.

 

해직과 복직, 그리고 구속의 연속

故 권영국 선생은 1958년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충주에서 태어났다.

공주사범대학교 물리교육과 재학시절 학내시위를 주도해 전국 수배됐고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나기 하루 전 광주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경찰서장으로부터 당시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해직시키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고 결국 자수하기에 이른다.

5.18 광주항쟁 관련 포고령 위반으로 연이은 구속, 고문, 그렇게 그는 3년이라는 시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법정에서 ‘인간 살인마 전두환을 역사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외침은 요즘도 일화로 회자된다.

1981년 특별사면 됐고 84년 공주사대에 다시 복학해 1986년 9월 1일 중원중학교 교사로 드디어 첫 발령을 받는다.

권영국 선생은 교육현장에 있으면서 전교조 전신인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 활동을 해오다 1989년 전교조 결성과 동시에 초대 충북지부장을 맡았다. 당시 지부장직을 맡는다는 것은 곧 법정에 서는 것과 같았다. 실제 지부장직 역임으로 100일간 구속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교단에 선 것은 해직 후 10년이나 지난 1998년 9월이었다.

제천중학교에 이어 주덕고등학교, 음성중학교, 충주중학교에서 8~9년 동안 권영국 선생은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길지 않은 교직생활을 이어가던 중 권영국 선생은 2007년 위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진단 당시 이미 암세포는 간과 뇌수까지 전이된 상태로 시한부 6개월을 선고 받은 것.

그는 2009년 3월 15일 투병 7개월 만에 향년 52세로 영면했다.

 

앞날을 내다보는 안목 있어

권뻥이라는 그의 별명은 ‘도전하고 창조’하는 성격을 대변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가능할거라 판단하는 일도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진행했기 때문.  

한빛전산원 설립은 대표적인 예다.

‘컴퓨팅’과 ‘정보화’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고 권영국 선생은 교육계에 컴퓨터를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 한빛 전산원을 설립, 교사운동에 통신네트워크를 도입하고자 노력한 것. 교사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고 데이터베이스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인식의 부족으로 인해 교육계 데이터베이스화와 전산화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고. 

추모식에 참석한 고홍수 씨는 “권영국 선생님은 데이터베이스에 대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다. 당시 정보화시대에 대한 교육계 인식은 백지상태라고 할 수 있다. 교사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고 컴퓨터를 도입하게 했다. 그 결과 수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권 선생님 덕에 컴퓨터의 일반화가 시도됐다. 지금 생각하면 권영국 선생님은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안목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권 선생님 뜻을 계승했다면 전교조 뿐 아니라 교육정책, 국가정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영국 선생님의 부재가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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