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해여서인지 보수와 진보를 둘러싼 정치권의 공방이 유난히 요란하다. 보수가 뭐길래 건전보수니 원조보수니 보수대연합이니 하여 야당인사들은 보수껴안기에 급급하고 여당은 여당대로 진보란 소리를 들을까봐 전전긍긍한다. 급변하는 상황에 재빠르게 적응하면서 남보다 한발 앞서 나아가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변혁과 진보의 시대에 어찌보면 시대착오적인 보수라는 상표를 자기 고유 브랜드인양 기를 쓰고 목청을 돋워가며 선전하는 이 기이한 광경이 세계화시대에 선진국진입을 겨냥하고 있다는 우리 정치권의 실상이다.
최근 제1야당의 정책위의장을 지낸 모 인사가 과거 대통령에 출마하는 이들은 모두 보수정책을 걸고 나와야 표를 얻지 좌파적 정강정책으로는 되지 않았다고 단언한 것을 보면 보수는 곧 표라는 인식이 아직도 정치권에 횡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인들은 곧잘 자신들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해줄 것이라고 말한다. 당대에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하는 정치인일수록 후세의 사가를 들먹이는 일이 더 빈번하다. 제5공화국청문회 과정에서 전두환이나 장세동 같은 이는 그 누구의 질책에도 당당하게 버티며 평가는 오직 후세 사가들이 내릴 것이라고 강변했다.
정치인들이 너나할 것없이 입에 올리는 후세 사가들의 평가란 어떤 것일까. 그들 역시 역사가인 이상 역사의식을 토대로 평가를 하게 마련이다. 역사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식이다. 아무리 비슷하더라도 똑같은 역사적 상황과 사건은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는 항상 당시의 상황 속에서 하는 것이고 거기서 얻은 지혜를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현실의 새로운 변수들을 충분히 감안하여 신중하게 재적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아일보사를 설립한 김성수의 생가가 있는 줄포에 가보면 읍사무소 뒤켠 한쪽에 이완용의 선정비가 숨듯이 비켜서 있다. 이완용의 일생이 오직 매국노라는 하나의 단어로 도색되어 인식되는 것은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조선, 동아일보가 일제시대에 천황을 숭배하고 대동아전쟁을 성전으로 찬양한 것도 그때의 상황 속에서 평가되어야지 지금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친일행각이 소홀히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진정한 역사적 지혜는 고통스러운 과거까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극복할 용기가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자만이 변화된 현실에서 건강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
역사의식에서 또하나 중요한 요소는 방향의식이다. 목적의식과 방향의식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역사의식이란 키없는 배와 같은 것이다. 한 사회의 주된 방향이 주권자인 국민의 생명보호와 안전 그리고 행복증진에 있다고 한다면 그 어떤 혁명이나 개혁의 과정에서도 이것이 손상되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보면 역사의식 속의 변화와 방향의식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서로 보완하며 지탱해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보수만을 외쳐대는 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도태의 대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국민의 행복 증진이라는 역사의 방향에 비교적 부합하는 요소일뿐 그 자체가 절대적인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시대에 맞게 부단히 변화해야 한다.
한편 국민의 행복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해 현실문제를 능동적이고 신속하게 개혁하려는 진보적사고는 바람직한 것이지만 문제는 그 속도가 제대로 된 방향과 결과를 아우르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보수주의자의 신중함과 진보주의자의 적극적 개혁성은 서로 배워야 할 장점인데도 제 상표만 전부라고 주장하는 자는 바보가 아니면 국민을 바보로 아는 자들이니 그들 모두 이 시대에 부적격한 지도자임은 한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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