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시아 꽃향기가 감미로운 5월, 우리국민들은 이틀 앞뒤로 몸서리 쳐지는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는 1961년 박정희 소장이 이끌었던 5·16 쿠데타요, 다른 하나는 1980년 전두환 소장이 주도한 5·18 광주대학살입니다. 좋든 싫든 이 두 사건은 우리 현대사의 악몽으로 역사에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어언 41년이 지났군요. 한 해전 학생들이 주도했던 4·19혁명으로 온 사회가 어지러운 가운데 정치권이 극도로 혼란한 틈을 타 박정희 장군을 필두로 한 일단의 군인들이 탱크를 앞 세워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 바로 5·16 군사쿠데타입니다. 물론 당시는 쿠데타란 말 대신 혁명이라는 표현을 섰습니다. 혁명이나 쿠데타나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는 정변(政變)이라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지만 혁명은 민심을 얻은 정당성 있는 행위로 인정받는 반면 쿠데타는 정권욕에서 비롯된 부당한 행위로 간주되는 고로 쿠데타 주역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조국근대화를 앞당긴 ‘구국의 혁명’으로 미화해 불렀던 것입니다.
당대의 표현이 어떠했든 뒤의 역사는 그것을 군사정변으로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고 지금 누구도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어느 정권이나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하기 마련이지만 5·16으로 태동한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두 갈래 평가가 엇갈립니다. 비판론자들은 탱크를 앞 세워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일과 독재를 통해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일을 크나큰 과오로 꼽습니다.
하지만 국민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경제발전의 기틀을 세운데 대한 업적을 높이 꼽고 있는 것 도 사실입니다.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것도 사실이고 경제를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니 만큼 솔직히 누군들 그에 대한 평가는 쉽게 단정을 내리기도 어려울 듯 싶습니다.
1980년 5월의 피비린내 나던 그 사건도 22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그때 국민들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열흘이 넘도록 알지 못 했습니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통신, 교통은 차단됐고 사태를 알려야 할 언론들은 눈을 감고 침묵했습니다. 아비규환 속에 군인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2백 여명을 무참히 학살하고 2800여명의 부상자를 냈습니다.
시민들의 순수한 민주화 운동은 불순분자, 폭도로 매도됐고 그 시위는 총칼로 정권을 장악하는 빌미가 됐습니다. 5·18광주항쟁에 대한 평가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정권욕에 들뜬 정치군인들의 폭거였다는데 이론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행히 그 의미에 대하여는 민주화운동으로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희생자들의 넋은 오늘도 말 없이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이 두 사건은 그 발단이 어디에 있던 이 나라가 정치 후진국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독일에서, 아니 일본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말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불법을 용인하고 받아들인 우리 국민의 의식에도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 우리가 새삼 다짐해야 할 것이 있다면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러한 불행한 일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똑 같은 비극을 되풀이한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광(陽光)이 눈부시고 신록은 어제와 다르게 더욱 푸른빛을 띄웁니다. 이제 10여일 뒤면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이 개막됩니다. 모두 다 역사적 대회가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기원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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