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 주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요한 15, 12-17)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당위적當爲的 논리를 우리는 합리合理(Rationality)라고 한다. 합리주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철학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다. 논리적 근간을 둔 합리를 뛰어넘는, 도무지 피조물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을 섭리攝理(Providence)라고 한다. 맹목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일정한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를 전제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다.

합리가 삶의 철학 영역이라면 섭리는 종교적 신학의 영역이다. 섭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초월적 그 무엇의 이치이다. 우리는 자연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위대한 현상을 두고 기적이라고 하는데 그 기적 또한 섭리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논리로는 도저히 설명되기 힘든, 그러면서도 우리 삶에서 나타나는 부분들을 한 번쯤 경험해 본 기억이 있을 게다. 그 경험은 경외심敬畏心을 동반한다.

▲ 신동효씨 신동효(요셉·45) 씨 또한 20년 가까운 종교의 냉담기를 거쳐 이제야 새로운 신앙심을 회복한 예술가요, 교수다.마산이 고향인 신 교수는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마친 뒤 현재 경남대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그가 꽃동네와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는 참으로 묘하다.“1996년 말이었죠. 경남대 교수님 가운데 꽃동네에 장기간 봉사를 하신 회계학 전공의 교수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만든 연구소가 ‘경남종합경영연구소’였어요. 그 연구소는 꽃동네의 정신을 살려 기업체에 만연된 일종의 병리현상을 치유하고자 하는데 연구의 중점을 둔 곳이었죠. 꽃동네 정신을 기업에 반영하여 봉사하는 연구소를 만든 것인데 제가 꽃동네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경남종합경영연구소는 회계, 문화, 교육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연구활동을 벌였다. 신 교수는 미대 교수였으므로 문화 부문에 대한 연구 활동을 할당 받았다. 꽃동네 사랑의연수원이 처음 생길 때 이 연구소 연구원들은 연수원의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봉사차 꽃동네를 방문했다. 그것이 1997년 1월이었다.“그때만 해도 사랑의연수원은 황무지였지요. 황량한 벌판에서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제 전공과 연수원 프로그램과는 궁합이 맞는 것이 없었어요. 단지 교육관 인테리어를 대학에 있는 친구가 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 돕는다는 가벼운 생각이었죠.”그때 신 교수는 신앙을 등한시 했었다. 20년 넘는 냉담기를 그는 거쳐왔었다.“천주교는 조부 때부터 저희 가정의 근간이 되는 신앙이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안 나가다보니 저희 집안식구들 중 저만 냉담자가 되었던 겁니다. 꽃동네에 와서 시설을 둘러봤어요. 일행들은 모두 교수들이었죠. 그러니 사회에서는 목에 힘 깨나 들어가는 사람들이었죠. 그런 사람들이 시설 가족들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그렇지만 저는 퀴퀴한 냄새만 날뿐 별다른 감흥이 없었어요. 오후 4시가 되었는데 황종현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 하시더군요. 강론 도중에 신부님께서 우리 팀원들을 불러냈어요. 그리고 가족들에게 우리를 소개해 주셨죠. 인사하니까 박수를 치더군요. 내려오려 하는데 황 신부님이 ‘박수 값 좀 하고 내려가라’고 하시더군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불렀어요. 한 할아버지께서 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셨어요. ‘구겨진 손’이었어요. 그 분과 눈이 마주쳤는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내가 저분보다 잘 살았을까.’ 그리고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어요. 수습할 길이 없더군요. 난감해 하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교수님들 모두 울고 있더군요.”저녁 때 신 교수는 오웅진 신부를 만났다. 연구팀원들의 프로그램 설명을 듣는 시간이 지나고 신 교수 소개 차례가 됐다. 신 교수는 조각을 전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오 신부가 대뜸 말했다.“꽃동네에 조각공원을 만듭시다.”신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거지동네에 웬 조각공원? 차라리 먹을 거나 줄 방도를 궁리하지.’그런데 신 교수를 유심히 바라보던 오 신부가 그의 속내를 읽었다는 듯이 말했다.“신 교수, 당신은 정상인들이 즐기는 것을 우리 꽃동네가족들은 왜 즐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 보시오.”그는 당황스러웠다. 말문이 막혔다. 언뜻 전율이 몸 전체로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치졸한 속마음을 어떻게 저렇듯 정확하게 되짚어내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놀라웠다. 어쨌든 그는 변명거리를 찾아야 했다.“신부님,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나는 최고의 것을 우리 가족들에게 늘 주고 싶소. 가능 여부만 말하세요.”“돈만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그러면 됐어요. 곧바로 일에 착수해 주세요.”신 교수는 다음날 마산으로 내려갔다. 한꺼번에 피곤이 몰려와 잠을 청했다. 곤한 잠을 자고난 뒤 서재로 가서 책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가 무심코 뽑아든 책은 그때까지 한 번도 읽지 않은 성서였다. 성서는 먼지투성이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천주님께 죄송한 짓 많이 했구나.’요한복음 15장이 눈에 들어왔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이런 좋은 말이 있었던가 싶었다. 늘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당을 피했는데, ‘하느님은 사랑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생각이 달라졌다. 교만한 마음이 사라졌다. 그때부터 신 교수는 주일미사에 꼭 참석하게 됐다.연구소 분위기는 늘 꽃동네 이야기로 화제가 집중 되었다. 그만큼 꽃동네와 결부된 프로그램에 모두들 큰 열의를 갖고 있었다. 그때 울산 골프장에서 상징물 의뢰가 들어왔다. 작업을 맡으면 상당한 돈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그런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늘 오 신부가 말한 조각공원만이 마음 속에 가득찼다.“조각공원을 만드는 것은 조각가의 가장 큰 꿈입니다. 그러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지요. 물론 저는 한 푼 받지 않고 봉사의 마음으로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조각품들을 꾸미는 재료비와, 인부들의 인건비 등이 만만한 것이 아니었거든요. 실제 비용이 얼마만큼 들어가는지 알게 되면 오 신부님께서 포기하실 것이라 지레짐작을 했었죠. 그래도 오 신부님께서 부탁하신 일은 제 일인만큼 실현 불가능한 일인 줄 알면서도 모형을 만들고 도면을 그리고 작업을 진척시켜 나갔죠. 그리고 비용문제를 세세하게 적었어요. 속으로는 포기하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도면을 들고 올라와 오 신부님께 보여드렸어요. 그런데 정말 기가 찰 노릇이죠.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돈이 그것밖에 안 드냐?’ 용접공 일당에 나사못 하나까지 세세하게 적은 작품 한 점당 비용이 9000만 원이었어요. 모두 14점이었으니까 13억 원에 육박하는 돈인데…… 속으로 혹시 신부님이 ‘0’하나 빼놓고 셈을 하시고 계신 것은 아닌가 생각됐어요. 오 신부님이 말씀하셨어요. ‘일은 될 겁니다. 기다리세요.’ 정말 엄청난 역사가 제 앞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죠.”보름이 지난 후 현대중공업에서 신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보일러 생산부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울산에 내려온 오 신부와 만나 신 교수는 생산부장을 찾았다. 부장은 싹싹한 말투로 말했다.“그 영광스러운 작업, 우리 부서에서 하게 됐습니다.”신 교수는 낯이 뜨거웠다. 평생 남에게 손 한 번 벌린 적 없고, 싫은 부탁 한 적이 없는데 자기 때문에 이 분들이 고생이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죄송합니다. 제가 번거로운 일을 떠맡겼습니다.”그러자 생산부장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무슨 말씀이에요? 각 부서에서 서로 맡겠다고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데요. 우리 부서에서 맡게 된 것 자체가 저희로선 영광이죠.”회사에서 꽃동네 조각공원 조성사업을 지원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현대중공업 사원들이 꽃동네를 방문해 봉사활동과 연수를 마치고 가면 생산성 효율이 20% 가량 높아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직원들이 서로 우리가 하자며 내 일처럼 거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조각공원 조성에 필요한 작품들 일체를 도면대로 모두 제작해 운송과 설치까지 맡아 주었다.“저는 다만 설계를 하고 도면을 만들고 감독만 했을 뿐입니다.”신 교수는 얼이 쑥 빠졌다. 무엇엔가 홀린 것만 같았다. 도저히 비용 때문에 불가능하게만 여겨졌던 것이 순식간에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 되었기 때문이었다.한 달하고 보름 후에 그는 작품 3점을 만들었다. 5월 8일 그는 그 작품을 설치하기 위해 꽃동네로 왔다. 가슴 속에는 무언지 알지 못할 충만감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그것은 네가 한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교만하지 말아라.”올라와보니 연수원은 개원 준비로 북새통이었다. 5월 11일까지 설치해야 하는데 매일 비가 내렸다. 용접을 할 수 없어 모두들 손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하는 수없이 그는 다른 막노동에 일손을 투입했다. 자신도 막노동 현장에 직접 뛰어들었다. 밥만 축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힘든 일을 하다보니 이 사람 저 사람 안면을 익힐 수 있었다. 모두들 자신의 일로 여기며 열심히 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다. 개원이 있기 전 마지막 날 가까스로 작품을 설치할 수 있었다. 작품을 설치하고나니 다시 폭우가 쏟아졌다.

“사랑의연수원 개원식 날 폭우 때문에 건물 안에서 미사를 올렸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오 신부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어요. 그런데 저는 오 신부님을 통해 묘한 경험을 하게 됐어요. 저는 밖에서 일을 거들고 있었는데 낮 12시가 되었을 무렵에 오 신부님께서 말씀 하시는 거예요. ‘지금 예언대로 성모님의 은은한 은총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무심결에 산 중턱에 있는 성모상을 쳐다보는데 산 밑으로부터 두 가닥의 안개 기둥이 성모상을 향해 올라가더니 성모상에서 하나로 합쳐지는 광경이 펼쳐지더군요. 그러고나니까 오 신부님께서 ‘이제 끝났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건물 안에서 어떻게 산 중턱에 있는 성모상에 벌어지는 이적異蹟을 알 수 있겠어요? 제 눈으로 똑똑히 목도하면서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더군요. 그날밤 오 신부님께서 번데기를 사오셨어요. 그리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먹으라 하시더군요. 오 신부님 말씀이, ‘내가 전부터 예언했는데, 이전부터 성모님의 은은한 은총이 있었던 게야’ 하시더군요.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면서도 믿기지가 않았어요. 자리도 불편하고 해서 번데기 두 알 먹고는 밖으로 나왔죠. 사제가 어떤 주술적인 힘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구요. 밖으로 나왔는데 머리가 근질근질하고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고 무언가 이상해요. 그런데 한 수녀님이 ‘아니, 교수님 얼굴이 왜 그래요?’ 하시는 거예요.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에 온통 두드러기가 나서 흉칙한 모습이지 뭡니까. 그뿐만 아니라 상반신 전체에 온통 두드러기 투성이에요. 다음 날 강의가 있는데, 참 난감하더군요.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무얼 먹었느냐 묻길래 번데기 두 알 밖에 먹은 게 없다고 하니까 누구와 먹었느냐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같이 번데기를 먹은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해보니까 그분들은 모두 멀쩡하신 거예요. 다음날 강의를 결국 하지 못하고 오후에 연구소에 가서 교수님들에게 그 말씀을 드렸더니 소장님께서, ‘하하하, 신 교수께서 오 신부님 얘기에 토나 달고 반발하고 의심을 하니까 벌 받은 거요. 앞으론 반항하지 마시오’하시며 웃으시더군요.”

신 교수는 이후로도 오 신부와 결부된 이상한 힘, 어찌보면 오 신부의 영적인 신비한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심상찮은 일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저는 교수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제 직업의 밑바탕이지요. 그런데 오 신부님으로부터 나오는 신비한 능력을 자꾸 보다보니까 너무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지더군요. 또 한 번은 미생물학 전공교수와 꽃동네에 온 적이 있는데, 웬 일가족이 할머니 한 분을 업고 오시더군요. 미생물학 교수님이 그 할머니를 보시더니 대뜸, ‘저런 사람을 왜 데려오지?’ 하시는 거예요. 말기 암환자의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래 우리는 종부성사 때문에 모시고 왔는가보다 생각했죠. 일가족이 오 신부님을 찾았어요. 오 신부님이 할머니를 보시더니, ‘할머니 소원이 무엇입니까?’ 물으니까, 할머니께서 ‘전 살고 싶습니다’ 하시더군요. 오 신부께서 저희들을 보시면서 그러면 우리 모두 같이 기도하자시며 친히 할머니께 안수기도를 해주시더군요. 그리고 오 신부님께서 나가셨는데 그 시체 같았던 할머니께서 벌떡 일어나 뛰어가며 오 신부님을 찾는 거예요.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 말이죠. 미생물학과 교수님이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하면서 로비만 뱅뱅 도시고…… 저는 저대로 어안이벙벙하고. 믿음이 강하신 분은 저런 기적도 행하시는가 보다,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신 교수는 꽃동네의 인도로 신앙적 은총을 입었다고 늘 말한다. 그런데 자신은 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꽃동네가족들을 위해 사랑의연수원 잔디밭에 그 큰 규모의 조각공원을 만들고도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는가 보다.

하루는 희망의집 가족이 신 교수에게 본명이 무어냐고 물어왔다. 요셉이라고 하자 그 가족은 ‘제가 요셉 형제님을 위해 기도해 드릴 게요’ 라고 했다. 신 교수는 그런 가족의 모습을 보고, 이것 무언가 거꾸로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내가 주어야 될 무엇인가를 거꾸로 그들로부터 받는다는 괜한 미안함이었다.

오 신부는 늘 강론을 통해 말했다.

‘거지는 달랄 줄만 알지 주는 것을 모른다.’

신 교수는 그 거지가 바로 자신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봉사라는 말도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는 아직 남아있는 꿈이 하나 있다. 가평꽃동네에 연수원이 생기면 그 곳에도 조각공원을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꽃동네가족들에게 예술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조형물을 보고 그냥 가슴에 새겨두는 느낌표 하나만 있어도 족하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처음 꽃동네와 인연을 맺고 자주 꽃동네를 찾았을 때 아내 김승혜(레아·45) 씨의 오해도 있었다. 무엇 숨겨둔 게 있어 그리 자주 찾느냐는 의심도 있었을 게다. 그러던 것이 아내를 데리고 꽃동네를 찾고부터는 오히려 그녀가 더욱 꽃동네에 대해 열정적인 애정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런 아내의 열정이 마산에서 꽃동네까지 대여섯 시간이 넘는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오게 만드는가 싶기도 하다.

“꽃동네를 알게 되면서 저는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있는 자리에는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바로 꽃동네가 그 증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꽃동네에 조각공원을 만든 교수가 아니라 꽃동네로부터 사랑을 배운 키 작은 학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