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O 핵심협약 비준과 노조할 권리

<캠페인 : 지역과 노동을 잇다> 비정규직 없는 충북만들기 운동본부(이하 ‘운동본부’)는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는 충북의 시민사회노동단체들의 연대체로 충북비정규직의 처우개선과 나아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사회양극화 및 불평등 해소’, ‘비정규직 문제 해결’, ‘노동존중’ 등이 시대적 과제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운동본부는 충북인뉴스와 지역의 저임금‵비정규 노동의 현실, 노동정책과 이슈 등을 통해 시대적 과제로 제기되는 문제들을 집어보려고 합니다. 지역과 노동을 잇는 소식이 ‘노동이 존중되는 충북, 살 맛 나는 충북’을 만들기 위한 걸음에 보탬이 되길 희망합니다. 충북인뉴스는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뿐만 아니라 모든 차별을 반대합니다. 비정규운동본부의 활동을 지지하고 응원하면서 활동가들이 기고한 글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밀린 숙제 : ILO 핵심협약 비준

글쓴이 : 하태현 (비정규직없는 충북만들기 운동본부)

 

하태현 노무사

우리나라는 1991년 ILO(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하였는데, ILO는 노동기준이나 노사관계 등 노동권의 적용범위, 권리의 내용, 이행방식을 포함한 사항들을 협약으로 만들어 각 회원국이 이를 비준하도록 하고 있다.

특히 ILO는 1998년 총회에서 「노동의 권리 및 기본원칙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면서 ‘결사의 자유’(제87호, 제98호), ‘강제노동금지’(제29호, 제105호), ‘아동노동금지’(제138호, 제182호) 그리고 ‘균등대우’(제100호, 제111호)에 관한 협약을 모든 ILO 회원국이 당연히 준수해야 할 핵심협약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은 ‘결사의 자유’와 ‘강제노동금지’에 관한 핵심협약을 지금까지 비준하지 않았다.

특히 1948년에 만들어진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87호와 제98호 협약은 ILO 191개 회원국 중 155개국 이상이 비준하였고, OECD 회원국 중에는 오직 미국과 한국만이 비준하지 않았다.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이 그리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 핵심 내용은 노동자들이 어떠한 간섭이나 방해 없이 스스로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어떠한 반노조적인 차별 없이 사용자와 자율적으로 교섭하여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는 제도적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노동자들이 스스로 단결할 권리, 노조할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원칙을 담고 있을 뿐이다.

벌써 70여년 전에 만들어진, 전 세계 155개국 이상이 비준한, 그리고 대부분의 OECD 회원국이 비준한 협약을, 지난 수십 년 동안 그 비준을 거부해 왔다는 것은 곧 우리 사회 노동자들이 노조할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해왔음을 상징하는 징표이기도 하다.

당연히 국내․외적으로 ILO 핵심협약 비준에 대한 압력이 높아져 왔고, 문재인 정부는 대통령 선거 당시 ILO핵심협약 비준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그 동안 우리나라가 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고,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을 제고하려면 제87호 및 제98호 협약을 조속히 비준할 필요가 있다며 정부에 협약 비준을 권고했다.

 

ILO 핵심협약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는 경사노위 논의

 

따라서 그 동안 무수히 반복된 약속에 따라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 등 ILO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절차를 밟아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ILO 핵심협약 비준과 관련한 논의를 경사노위(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넘겨버렸다.

노사정 협의체인 경사노위에 자신의 밀린 숙제를 넘긴 것은 ILO 핵심협약의 비준 여부를 사실상 노사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경사노위에서 경영계는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 관련 논의가 전제되지 않으면 ILO핵심협약 비준에 반대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경사노위 역시 이를 ILO 핵심협약 비준과 연동하여 논의 테이블에 올리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런데 경영계가 ILO협약 비준의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는 요구들이 하나같이 경악할 만한 것들이다.

경영계가 노조법 개정을 위해 경사노위에 제출한 요구안은 △ 쟁의기간 중 대체근로 허용 △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 단체협약 유효기간 최대 4년으로 연장 △ 부당노동행위 형사처벌 조항 삭제, 노동조합의 부당노동행위 신설 △ 쟁의행위 찬반투표 절차 강화(찬반투표 유효기간 60일 등)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구들은 그 자체로 ILO 협약에 반하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그 동안 사용자들이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거나 파괴하기 위해 사용해 왔던 대표적인 수단들이다.

경영계가 내놓은 요구안이 상정하는 노사관계의 모습은 거칠게 얘기하면 이렇게 된다. 어느 한 사업장에서 너무나 열악한 노동환경을 조금이라도 개선해보고자 노동조합을 만들어 단체교섭을 요구해도 최장 4년 가까이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아도 된다.

그 사이에 또는 단체교섭을 개시해야 할 때 노동조합을 깨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형사처벌 받을 일 없으니 그 긴 시간을 노동조합이 버텨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끈질기게 버텨 노동조합이 파업에까지 이른다 해도 회사가 대체근로를 전면 투입하고,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금지시키면 노동조합의 파업은 무력화된다,

결국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시 4년 동안은 노조와 교섭할 일 없이 사용자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런 노동조합이라면 그 누구도 감히 노동조합을 만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말이다.

 

ILO 핵심협약을 즉시 비준하고, 노조법 개악논의는 즉각 중단해야

 

이는 노동자들의 단결할 권리, 노조할 권리가 제도적으로 봉쇄된 사회를 꿈꾸는 것이고, ILO 제87호 및 제98호 협약이 만들어졌던 1940년대 이전, 즉 단결금지의 시대로 회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조할 권리를 선언한 ILO 핵심협약을 비준하라고 했더니 기가 막히게도 노동조합 없는 사업장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고 있는 꼴이다.

지난 2019. 3. 5.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는 노무사, 변호사, 노동법학자 등 여러 노동법률가 지금 경사노위 내에서 진행되는 논의들을 비판하며 기자회견을 하였다.

ILO 핵심협약의 비준이 논의되고 있는 이 순간 이들이 외친 말을 다시금 되새겨 봐야 할 때이다.

“노동기본권은 거래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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