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5월은 왔다. 봄의 절정인 5월은 온나라를 행사의 열기로 달군다. 어린이·어버이·스승의 날로 숨돌릴 새 없고 관광버스가 연중 가장 바쁜 때다.
특히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올해의 5월 행사장은 유난히 북적여 보인다. 청주를 벗어나는 국도변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문체육대회 현수막이 만장처럼 나부낀다. ‘우리는 만나야 한다’는 집단회귀 본능이 대한민국 남성들을 사로잡는다. 집단에 합류하지 못하면 막연히 불안하고 그 속에 있으면 막연한 안도감을 느낀다.
집단속의 강한 동질감은 한국인 특유의 연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혈연·지연·학연으로 압축되는 집단의식은 한국인의 ‘情’으로 용인되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연고주의라는 얼굴에서 온정주의와 패거리즘이라는 두 개의 뿔을 본다. 내 집단에 속한 사람의 ‘허물’은 작게 봐주고 ‘능력’은 과대포장한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가 남이갗 로 시작하면 원칙과 합리는 숨죽일 수밖에 없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고 하면 당연히 ‘연고주의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데 동의할 것이다.
특히 선거철에 발휘되는 연고주의는 곧바로 국가존망을 위협하는 핵폭탄이 된다. 대선·총선에 등장하는 지역감정은 박정희정권부터 40여년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영호남의 틈새에서 입지를 모색해온 충청권은 정권말이면 늘 토사구팽이었다.
노정객 JP의 노추(老醜)를 보면서 충청권의 눈치정치가 드디어 종말을 고할 때가 온 것같아 되레 다행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지방자치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에서 소지역주의가 꿈뜰대는 현실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북부권, 남부권 기반을 가진 도지사 후보의 격돌, 청주 A고와 B고 동문의 자존심을 건 시장선거, 특정 姓씨 못자리판이라 ‘외인 출마금지’인 지방의원 선거…, 다양한 각축전의 배경은 결국 갈수록 작게 잘린 연고조각들이다.
5월의 학교동문체육대회장에서 마주친 지방선거 후보자들의 손을 잡으며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나’를 반문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아침 모신문에 실린 짤막한 과학칼럼 한토막이 내 속에 명쾌한 계시처럼 자리잡았다.
인용하면, 서양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섯 다리만 걸치면 어느 누구와도 통할 수 있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다섯단계의 분리’라는 개념인데, 간단한 계산법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100명의 친구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면, 2단계에서는 친구 100명의 친구들인 1만명, 3단계에서는 100만명과 연결된다. 자신으로부터 두 다리만 건너뛰면 100만명과 연줄이 닿을 수 있다는 얘기다.
4단계에서는 1억명, 5단계에서는 100억명이 되므로 결국 세계인구 60억명의 어느 누구와도 아는 사이가 된다는 가설이다. 우리가 네다리만 건너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니콜 키드먼이나 오사마 빈라덴과 악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가?
내 주변의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지 않은가?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