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애한 가운데 하나는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 고민이다.

충북 출신 독립운동가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 역시 생활고에 힘들어하는 가족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28일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단재의 경제적 곤란은 중국 베이징에서 만난 류자명(柳子明·1894~1985)의 수기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3년 중국 료녕인민출판사가 펴낸 '한 혁명자의 회억록'(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9년 간행)에서, 류자명은 "단재는 북경에서 역사를 연구하면서 부인과 함께 살고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생활하기가 어려워 부인과 아들을 한성(서울)에 보내 고향 친구인 홍명희에게 의탁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홍명희는 조선일보와 관계가 있어 단재가 역사 연구에 관한 글을 보내면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보수금을 부인과 아들의 생활비로 했다"라며 "40세가 넘은 단재는 항상 부인과 아들을 생각하고 정신상 고통을  나에게 말했다"라고 덧붙였다.

단재는 가까웠던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1888~1968)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단재는 이 편지에서 부인과 네 살배기 아들이 사는 주소를 알려주고 벽초에게 방문해 생활 형편을 살펴주길 당부했다.

단재는 신문과 잡지에 발표한 논문이 서울 가족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고 했고 자신도 평생 궁핍한 생활을 했지만 그렇다고 돈에 비굴하지는 않았다.

박 교수는 "단재는 매우 엄격한 역사 편찬의 태도를 견지했고 민족주의 사가로서의 당당한 격조를 잃지 않았다"라며 "자신의 원고 한 자(字) 한 구(句)의 가감이나 이동을 허락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단재는 부인 박자혜(朴慈惠·1895~1943) 선생과 함께 부부독립운동가다.

신채호와 홍명희, 류자명은 충북 청주와 괴산, 충주 출신이다.

이들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고된 삶 속에서 동향인(同鄕人)으로 의기투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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