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7월 청주상고 교사등 100여명 집단학살 매장시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지난 2009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해자 청주청원 합동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충북도는 올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희생자 유해 발굴 사업으로 보은 내북면 아곡리를 선정했다.  아곡리는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선정한 도내 우선 발굴 대상지 6곳에 포함됐으며 충북도와 도내 유족회 간담회 때 최종 대상지로 선정됐다.

도내 민간인 학살 매장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87곳이며 2007~2008년 청주 분터골과 지경골 2곳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뤄졌다. 이후 MB정부 출범이후 근거법 기간 만료돼 발굴사업이 중단됐다.

도는 올해 자체 사업으로 5000만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보조사업자 공고와 심의를 거쳐 ㈔민족문제연구소를 사업자로 선정했다. 아곡리에서 희생된 민간인은 청주지역에서 소집된 150여 명으로 추정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3월초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해 수습된 유해는 보존 처리를 거쳐 세종시 '추모의 집'에 안치할 예정이다. 충북도는 국회 계류 중인 과거사 관련법(7건) 제·개정이 이뤄지면 국가사업과 연계해 추진할 방침이다.

아곡리 민간인 희생자 매장지는 이미 2014년 6월 청주·청원 보도연맹유족회, 충북역사문화연대가 일부 발굴작업을 진행했었다. 정부와 지자체가 외면하는 가운데 민간단체가 장비를 동원해 20여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2004년 청주청원유족회의 보은 내북면 아곡리 보도연맹 양민학살 매장지 자체 발굴작업 모습.

당시 발굴 현장에서 취재진을 만난 주민 신덕호씨는“그때 (1950년 7월10일께) 군인·경찰이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들을 전부 집에 들어가게 하고 산골짜기 쪽에서 총소리가 나구 비명이 들렸다. 트럭이 서너대 왔으니까 한 100명쯤 되는 것 같다. 총살 한 뒤에 마을 사람들 불러놓구 ‘빨갱이 잡아놨으니 장례 치르라’고 해서 우리가 가까운 야산 3곳에 시신을 매장했다”고 증언했다. 

보은 아곡리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은 지난 1994년 <충청리뷰>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취재진을 만난 목격 주민 황성철씨는 “7월7일 오전 10시께 아곡리에 트럭 5~6대가 들어와 여기서 내린 사람들을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살시켰다. 마을주민들은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지시를 받고 구덩이에 시신을 묻었다. 여자들도 몇명 보였다”고 진술했다.
 
또한 아곡리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 가운데 청주 가족들이 유일하게 시신을 수습한 경우도 확인됐다. 당시 청주상고 교사였던 고 강해규씨(당시 30세)는 청주경찰서 무덕관(강당)으로 소집된 뒤 몇일후 아곡리까지 끌려가 죽임을 당한 것. 강 교사의 경우 가족들이 뒤늦게 시신을 수습하고 현장 인근 산자락에 위령비를 세운 것이 확인됐다.

94년 취재진과 연락이 닿은 미망인 이숙용씨(당시 72세)의 기억은 생생했다. “전쟁나고 얼마 안 지났을 땐데. 전날 밤에 학교에 숙직하러 간 애들 아빠가 다음날 낮이 됐는데도 안오길래 걱정이 됐어요. 근데 친구분이 부리나케 찾아와서 경찰에 붙잡혀갔다고 그러더라구요. 얼른 경찰서로 가보라고 하길래 음식 준비할 새도없이 빵을 사가지고 달려갔어요”

이씨가 청주경찰서 앞에 도착하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군용트럭 4∼5대를 둘러싸고 가족을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가운데 트럭안에는 젊은 나이의 보도연맹원들이 힘없이 앉아있었다. 남쪽으로 먼저 피난시켜 준다는 헌병들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은 가족들은 이들에게 음식, 옷등이 담긴 보퉁이를 건네주며 안부를 빌었다. “가까스로 남편을 찾았는데 왜 이제서야 오느냐구 물었어요. 미안한 마음에 빵하고 쓰고있던 우산을 건네줬더니 ‘당신 비맞으면 안된다’면서 그냥 비를 맞구 떠났는데…”

이씨가 다시 남편을 만난 것은 그로부터 4∼5일 뒤. 학살 소문을 들은 보은 친정집에서 전갈을 해주는 바람에 용케 아곡리까지 찾아나선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승과 저승의 사람으로 재회했고 어수선한 난리통에 경황도 없이 끔찍한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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