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3·1만세운동이 충북에서는 어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는지를 놓고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25일 국사편찬위원회(국편)의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당시 3·1만세운동은 전국에서 시위 1692건, 계획 350건, 기타 활동 333건 등 2464건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충북에서는 84건이 일어나 최소 3만6338명에서 최대 4만5328명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망자도 최소 37명에서 최대 43명으로 국편은 추산했다.

국편은 이번 만세운동 DB 분석 자료를 공개하면서 충북 만세운동 발원지를 종전 학계와는 달리 해석했다.

충북지역 학계는 3월 19일 홍명희 등이 주도한 괴산읍내 만세시위를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조선헌병대사령부의 `조선소요사건상황(朝鮮騷擾事件狀況)'에는 이날 700명이 시장에서 시위를 벌여 경찰이 주동자 4명을 붙잡았다. 조선총독부경무국의 `고등경찰관계연표(高等警察關係年表)'에도 충북에서 처음으로 이날 괴산 장날을 이용, 600명이 경찰서를 습격해 주모자 7명을 붙잡은 것으로 적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도 3월 19일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홍명희·이재성·홍용식·홍태식·심형택·김인수 등 일반인과 곽용순·이병석·윤명구 등 학생이 경찰에 붙잡혔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하지만 국편이 지난 20일을 기준으로 공개한 자료에는 괴산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보다 나흘 앞선 3월 15일 진천 시위를 첫 번째로 올렸다.

국편은 `3월 15일 충북 진천 시위 사전탄압'이란 제목의 개요에서 “진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진천헌병분대 헌병들이 사전에 탐지하고 제지해 독립만세를 외치지 못했다. 헌병들에게 학생 22명이 체포를 당해 심문 취조를 받았고 14명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를 당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개람표와 일람표 자료에 미연 방지로 적혀 있지만 3월 16일 보고 자료 등에 운동이 있었다고 명백히 적혀 있어 시행에 옮겨지긴 했다”라며 “참가자 수에 대한 직접 언급은 없지만 50~250명의 소규모 시위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국편은 `조선소요관계서류(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의 조선헌병대사령관 전보(電報) 자료 등을 근거로 3월 15일 진천에서 시위가 실제 있었던 것으로 봤다.

다만 만세운동이 있었다고 하면서도 `시행에 옮겨지긴 했다'며 다소 모호한 표현을 썼다.

국편은 4월 5일 `영동 추풍령헌병분견소 방화'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시위 제목을 모두 `○○ 시위'로 매듭지으면서도 3월 15일 진천 시위에만 `○○ 시위 사전 탄압'으로 적었다.

충북 학계에서도 국편이 공개한 이번 분석 자료에 대해 시각이 엇갈린다.

종전대로 3월 15일 진천 시위는 사전에 발각돼 불발됐다는 주장과 헌병대사령관이 보고할 정도라면 시위가 제법 규모가 있었다는 해석이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당시 진천 시위를 주도한 이상직(李相稷·1878~1947)은 “3월15일 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이튿날 새벽 일제 경찰에 구속되자 그가 없이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됐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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