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항토사학자

60대 이상의 노인을 생매장했다는 ‘고려장’은 있었나 없었나? 관련학계의 오랜 논쟁은 아직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신문매체에서 또 한번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요즘 H신문 ‘시민사회 토론공간’을 보면 이른바 ‘고려장 논쟁’이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고려장은 없었다’에 동조하고 싶다. 그 증거로 우선 고려시대 상황을 설명치 않을 수 없다. 고려시대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하였으나 유교의 덕목이 사회윤리 버팀목의 한 축 역할을 하였다. 이 시대에 효 사상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손순매아(孫順埋兒)의 설화다. 효성이 지극한 손순은 아버지를 여의고 노모인 운오(運烏)를 극진히 봉양하며 살았다. 궁핍한 살림에 아이가 할머니(운오)의 반찬을 자꾸 빼앗아 먹었다. 손순은 아내와 상의 끝에 아이를 땅에 묻기로 하고 땅을 팠는데 그곳에서 기이한 석종(石鐘)이 나왔다. 손순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아이를 묻지 않고 석종을 집으로 가져와 들보에 매달아놓고 치니 그 은은한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興德王)은 사신을 보내 그 연유를 알아보고 효성에 감탄하여 집과 매년 쌀 50석을 손순에게 내렸다. 신라시대에도 이같은 효사상이 지배적이었는데 불국(佛國)을 이어받은 고려시대에서 아들이 부모를 늙었다고 해서 생매장하는 풍습이 생겨났다고 유추하기는 매우 어렵다. 두 번째로 고려, 조선의 고문헌을 통틀어 고려장 풍습을 기록한 문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조선말 일부 외국인이 이를 언급한 사례가 있다 치더라도 고금의 문헌을 인용하지 않은 채 설화정도를 사실인양 기록하여 기정사실화 하는 것은 신빙성이 없다. 모름지기 역사학은 실증적이어야 한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떠도는 이야기나 관념적인 것을 인위적으로 기술하는 것은 사료로서 가치가 적다.

세 번째, 고려장 이야기는 일제가 조작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개성 등 고도에 고려 무덤이 매우 많았다. 도굴에 혈안이 된 일인들은 고려무덤을 마구 파헤치고 여기서 숟가락이나 밥그릇 등이 나오자 생매장 풍습 운운하며 고래로 한국이 가난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퍼뜨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무덤에서 주방그릇이 나오는 것은 고려시대의 무덤뿐만 아니라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다.

사자(死者)가 생존시에 쓰던 생활 용품을 껴묻거리(부장품)로 함께 묻은 것이다. 이른 백제 시대의 최대고분군으로 알려진 청주 신봉동 백제 고분군에서는 질그릇, 무구류 등 부장품이 무진장 나온다. 명암동 우회도로를 낼 당시 발굴 조사된 고려시대의 무덤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비의 필수품인 고려 먹이 부장품으로 나온 바 있다.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는 명문이 선명하여 곧 단양지역에서 생산된 제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럼으로 숟가락 등은 망인의 시한부 삶을 살아야 하는 도구가 아니라 묻힌 자의 단순한 부장품에 불과하다.

넷째, 초등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고려장 설화’는 효 사상을 강조하기 위하여 편집된 것이지 고려시대 고려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말하고자 기술된 내용이 아니다. 따라서 고려장과 지게에 얽힌 설화 부분은 검증을 거친 후 게재 여부를 결정해야지 노인을 생매장했다는 사실에 대한 검증도 없이 싣는 것은 잘못이라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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