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장락사 ‘조선왕조실록’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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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 장락사 ‘조선왕조실록’이 말한다
  • 정홍철 기자
  • 승인 2004.1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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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명찰, 7층 모전석탑은 보물 제459호 지정
충청대학 박물관(관장 장준식 교수)이 지난 2002년 12월부터 시굴조사를 맡은 장락사지는 가람의 남쪽에 보물 제 459호인 장락동 7층 모전석탑이 있고, 그동안 다양한 연대에 걸쳐 다량의 기와편들이 출토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유적지이다.

출토된 기와의 명문은 ▲‘長’자명기와 ▲‘○○六月大吉’명기와 ▲‘天○’명기와 ! ▲‘責三’명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이중 ‘長’자명기와는 장락사지를 밝히는 주요한 유물중 하나이다. 발굴을 맡은 장준식 교수는 “시굴과 발굴조사에서 장락사지는 삼국시대 말에서부터 조선시대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법등이 이어져 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의 부락의 지명과 ‘長’ 자명의 출토 기와로 볼 때<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자복사(資福寺)로 지정된 ‘장락사(長樂寺)’의 원 위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복사의 의미에서 장락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조선왕조실록>은 ‘議政府請以名刹代諸州資福’이라 적고 있다. 즉 ‘명찰로써 자복사를 대신한다’라고 하였으며 제천(당시 堤州)에서는‘장락사’가 지정되었다. 이를 통해 장락사는 명찰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태종대 이전에 이미 장락사에서 법등을 밝히는 명찰이었음을 미뤄 짐작케 하고 있다.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의 사찰은 비단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관청의 행사나 지역의 중요한 행사를 주관하였다. 연등회나 팔관회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도 사찰이 주관하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큰 규모의 행사를 수행하기 위해서 중앙정부나 지방에서는 그런 행사를 주관한 주요한 사찰을 지명하거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장락사지에서 당간을 세우기 위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발굴되었다. 이는 국찰 등의 큰 규모의 사찰에 세워지는 것이 보통으로 장락사는 대규모행사시 법당에서 많은 인파를 수용치 못해 야외법회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장락사지에서 발굴된 당간지주의 잔존길이는 220cm 너비 41cm, 두께20cm, 간공의 지름은 10cm로 확인되었다. 여기에 굵직하고 긴 장대를 세워 부처님의 설법이나 위신력을 그린 커다란 그림인 당(幢)을 당간(幢竿)에 걸친 것이다.

다양한 유물, 고른 시대분포 보여

이번 조사에서 출토된 유물은 와전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토기류와 자기류, 금속재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출토유물의 시대적 범위는 삼국기 말엽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전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포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물의 출토량은 기와류가 가장 많았고 토기 도자기, 금속유물, 토제유물 등이 고르게 출토되었다.

특히 삼국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연화문수막새기와, 무문암막새기와, 승문평기와, 모골와통으로 제작된 기와 등은 제천지역에서는 처음 확인된 삼국시대 기와류로 제천지방의 지역적문화요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막새기와는 연화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당초문, 귀면문, 귀목문, 무문 등이 출토되었다. 시기적으로는 삼국시대, 통일신라, 고려시대 등 다양한 분포양상을 띠고 있어 유적의 창건과 존속시기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평가다.

연화문수막새의 경우 14종으로 막새류기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연화문수막새의 경우 주연부가 높고 자방과 연판사이를 구상권대로 구분하는 등 고구려적 요소가 짙게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천지부가 낮은 무문 암막새기와는 삼국시대에 제작된 암막새 기와로서 초기 암막새기와의 제작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판단되고 있다.

발굴조사결과 장락사지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이후 조선초까지 6차례에 걸쳐 중창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장 교수는 “유구 상면에는 직선문기와, 무문기와 등과 모골와통으로 제작된 기와 등이 출토되어 늦어도 삼국시대 말경에는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제천에서 이 시기와 관련되어지는 불교유적의 확인은 최초”라고 말했다.이어 그는 “발굴된 유물 중 평기와와 해무리굽청자, 토기병 등 고려시대 것과 인화문분청사기편, 회청색 경질기 등이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조선 초기까지는 장락사가 존속했음을 알 수 있고 임진왜란을 전후해 폐사했을 것으로 추정 된다”고 밝혔다.

장락사와 장락동7층모전석탑과의 관계

보물 제459호로 지정된 ‘장락동7층모전석탑’은 탑의 전통적 위치인 장락사지 가람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조성된 모전탑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연대는 조탑형식이나 전재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자연석으로 결구하였으며 1층탑신 네귀에 화강암으로 된 석주를 세웠고 탑신 남북으로는 감실을 마련하였다. 2층 이상의 탑신석이나 옥개석은 전부 점판암을 절단하여 쌓아 올렸으며 특히 옥개석은 전탑에서 보이는 형식과 같이 상하에서 층단을 이루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층의 체감률이 적당하여 장중한 기풍을 보여주고 있다. 6ㆍ25동란 때의 심한 피해로 도괴 직전에 있었는데, 1967년 해체 복원되었다. 이때 7층 옥개 상면에서 꽃 모양이 투각 조식된 청동편이 발견되어 상륜부의 구성은 청동재로 조성하였던 것으로 추정 된다. 이후 1999년에 보호철책이 둘러졌다.

장락동7층모전석탑은 원형이 가장 잘 보전되어있는 모전석탑으로서 역사ㆍ미술사적 가치를 감안하여 국가 최상급 문화재로 승격 지정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시굴조사발표자리에서 정영호 교수(단국대학교 석좌교수)는 “시굴조사에서 발굴된 유물수는 적지만 그 종류는 다양해 유구와 유물의 유기적관계가 조사된다면 장락동7층모전석탑의 국가 최상급문화재의 승격지정도 전망해 볼 수 있다”고 말한바 있어 장락사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했다. 이어 조유전 문화재위원(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도 “사적이 있어야 국보지정이 전망적”이라고 말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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