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청주의 중심가는 상당구 성안길 일대이지만 고대의 중심가는 반드시 현재와 일치하지 않는다. 통일신라에서 현재까지는 상당산성이나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청주 시민들이 모여 살았다.그러나 신라, 백제, 고구려가 각축을 벌이던 삼국시대나 그 이전 부족국가 시대, 청동기, 신석기, 구석기 시대에는 상당구보다 흥덕구 쪽에 몰려 살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지리적인 여건에서 동쪽은 산악지대로 꽉 막혀 있고 미호천이 흐르는 서쪽은 툭 터진 평야지대다.

삶의 터전은 기름진 땅과 물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형성된 산간 분지 사이로 금강이 흘러가니 그 냇가에 모여 농사를 짓고 질그릇을 빚으며 오순도순 살아갔던 것이다.

삶의 족적은 청주 동쪽보다 서쪽에서 더 많이 발견된다. 봉명동, 송절동, 신봉동 일대에는 마한(馬韓)의 유물 유적과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된다. 봉명동 일대에서는 청동기, 초기철기 시대의 수많은 집터와 무덤자리가 찾아졌다. 높이 1m의 거대한 항아리가 출토되었는가 하면 우리나라 최고의 금석문으로 평가되는 대길(大吉)명 소동탁(小銅鐸:말방울)도 나왔다.

신봉동 백제고분은 삼국초기의 흔적이다. 이곳에서는 토기를 비롯하여 손잡이에 둥근 고리가 달린 환두대도, 말재갈, 갑옷, 화살촉 등이 집중 출토된 바 있다. 이른 시기의 백제 철기집단이 토착세력인 마한의 토기집단을 정복하고 백제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신봉동처럼 이른 백제의 유적이 광범위하게 널려있는 곳이 없다.

옛 절의 흔적도 그렇다. 직지를 인쇄한 흥덕사지를 비롯하여 신라 삼대 범종의 하나로 꼽히는 운천동 사지 범종은 무심천 가, 이름 없는 절터에서 나왔다. 빨래판으로 사용하던 신라사적비도 인근에서 출토된 것이다.무심천 변 용화사의 옛 절 이름은 지눌의 법맥을 이은 혜심이 하안거(夏安居)를 했다는 사뇌사(思惱寺)가 거의 확실하다. 전주 이설공사를 하다 나온 청동 기름말 등 사뇌사 출토 유물은 현재 국립 청주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최근에 중원문화재연구원이 발굴조사를 실시한 부모산성을 봐도 고대 청주의 다운타운은 흥덕구일 가능성이 높다. 마한 시대에 부모산 일대에는 마한 54개국중의 하나인 아양국(我養國, 我讓國)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부모산성의 북쪽 계곡부를 조사하니 높이 7m, 너비 7m60cm 가량의 협축산성 성벽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산성이 밖을 돌로 쌓고 안으로는 흙과 자갈을 다진 내탁공법의 산성인데 비해 부모산성은 안팎을 모두 돌로 쌓고 그 틈새도 돌로 채운 협축산성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제의 웅진, 사비시기에서만 출토되는 ‘前’자명 인장와(도장을 찍은 듯한 기와무늬)가 7점이나 출토되어 백제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조선 영조~숙종 때 대대적으로 개축한 상당산성은 서쪽 벽 발굴조사에서 후삼국 시대 궁예가 쌓은 성벽이 드러난 바 있는데 부모산성은 이보다 훨씬 먼저 쌓은 고식의 산성이다.

물론 상당산성 공남문 밖에서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고 서원경성의 치소(治所:행정 중심지)가 상당산성설, 우암산성설, 청주읍성설로 회자되고 있지만 그보다 먼저 청주 시민이 더 많이 모여 살던 곳은 아무래도 무심천 건너 서쪽편인 듯 싶다. 오늘날 가경동, 복대동 일대로 중심 상권이 옮아가고 흥덕구 인구가 더 많은 것은 역사의 어떤 회전 법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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