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의원, 노동운동하다 1989년부터 3년간 청주교도소 복역
“감옥에 가니까 독방 줘…와! 내방 생겼다” 낙천주의자 면모

정의당충북도당 사무실에 차려진 고 노회찬 의원의 빈소. 노 의원은 노동운동 과정에서 1989년부터 만 3년동안 청주교도소에서 복역했다. 그는 이 시기를 '인생의 황금기'라고 회상하면서 청주를 제2의 고향이라고 말했었다.(사진 정의당 충북도당)

 

진보정치의 큰 별이 졌다. 열일곱 살때부터 유신반대 투쟁에 나선 이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길은 외길이었다. 또 가시밭길 이었다.

젊은 시절은 수배와 감옥생활, 중년 이후는 진보정당 외길에 대한 도전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노동운동가 진보정당 운동가로서 숙명처럼 이고 가야했던 가난 했던 삶.

그 가난에 대해서도 “나무젓가락만 있으면 사막에 가서도 살수 있다”며 특유의 너털웃음으로 넘어갔다.

노회찬 의원이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시절인 2004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충북 청주를 제2의 고향이자 이곳에서 보낸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했다.

왜 청주는 노회찬 의원에게 황금기였을까?

노회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감옥에 가니까 정치범이라고 독방 주잖아. 나는 '와! 내방 생겼다'는 기쁨, 누가 날 감시하는 것도 없고. 눈치 안 봐도 되잖아. 수배자 때는 상상도 못했지. 청주가 제2의 고향이야“

그랬다. 노회찬 의원은 1989년부터 꼬박 3년을 청주교도소에서 보냈다. 그때 노 의원의 나이는 34세.

그가 회고했던 감옥생활의 키워드는 독방, 영화, 테니스, 식빵에 요구르트를 부어서 만든 술이다.

왜 영화일까. 노 의원은 이렇게 얘기했다.

“정치범들은 다른 재소자들을 물들인다고 따로 모아놓고 영화 보여주는데, 맨날 폭력영화야. 교화하는 곳인데 폭력영화라니. 그래서 면담 신청을 해서 영화는 우리가 선정하게 됐지. 그런데 갈등이 생긴거야. 주윤발 나오는거 보고 싶어하는거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재미없다는 거야. 그래서 '야 임마! 톨스토이 안보겠다는 거야. 그러고도 운동권이야?' 다 후배니까 할 말이 없지, 그런데 내가 봐도 재미가 없어. 전쟁 장면 나올 땐 좀 보고 평화장면에는 자고. 그때 위신이 실추됐지.”

술은 어떻게 확보했을까? 노 전 의원은 “술은 식빵에 요구르트 부어서 만들어 먹었지. 식빵에 이스트 남아 있잖아. 누런 테두리 벗겨내고 패트병에 넣어서 요구르트 부어 따뜻하게 하면 막걸리 도수가 나와. 그런데 알코올 도수를 높이려고 부단히 노력을 해. 원기소가 이스트 덩어리잖아”라고 말했다.

이스트 역할을 하는 ‘원기소’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노 전 의원은 “의무실에 가서 '갑자기 기력이 없다. 아프다. 원기소 먹으면 나을 것 같아요'해서 얻어 온 원기소를 넣으면 알코올 도수가 2도는 높아져요. 면회온 사람들이 '뭐 필요하냐'고 하면 '요구르트 200병 넣어주세요'라고 했다”고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웠을 감옥 생활속에서도 노회찬 의원은 ‘낙천주의자’의 모습을 놓지 않았다.

 

염형철 “함께 한 2년의 생활이 아깝지 않은 시간”

 

염형철 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은 노회찬 의원과 청주교도소 감방동기다. 만 2년을 같이 지냈다. 염 전 총장은 충북대학교 총확생회장과 충북대협의장을 맡았고 그로 인해 청주교도소에 복역했다.

그에게 노회찬 의원은 어떤 기억일까? 염 전 총장은 23일 페이스북에 “하늘이 무너지는게 이런 느낌일까요?”라며 “머리 속이 하해 져 느낌이 없습니다”라며 고인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겼다.

염 전 총장은 “스물셋에 청주교도소에서 처음 만났고, 그 곳에서의 2년이 아깝기는커녕 세상을 사는 원칙과 지혜를 배웠다고 고맙게 생각케 했던 분이 노 선배님이었다”고 했다.

이어 “멀리서 활동하면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힘을 내도록 하셨던 분이구요”라며 “깊은 슬픔으로 선배님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말했다.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장문식 전 전농충북도연맹 의장도 “수감생활을 하는 동료들에게 공부하라고 많이 강조했다”며 고인의 죽음에 아파했다.

지난 6·13 선거에서 제천·단양 보궐선거에 당선된 이후삼 국회의원도 노회찬 의원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노 전의원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함께하며 수배생활을 함께 했던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는 “진보정치에 대한 고난을 길을 가면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낙천주의자”라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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