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슬한 바람이 품속을 파고들었다. 흐릿한 하늘색이 오늘은 유난히 더 파랗다. 초겨울 파란 하늘색은 작은 내 몸을 더욱 오그라들게 했다. 낯선 이방인을 대하 듯, 찬바람을 피해보려 옷깃을 단단히 여미고 몸을 움츠려 보지만 나의 내면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냉기로 인해 온 몸은 사시나무를 닮아갔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웅크린 채 종종 걸음 치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고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는 측은지심이 절로 일어 그 안타까움에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둠이 시나브로 깔리는 아파트 골목길로 접어드니 구석진 담벼락에 오글오글 모여 오소소 떨고 있는 낙엽들이 영락없는 내 모습인 듯싶다. 나무에서 떨어진지 한참이나 되었건만 아직도 그 품이 그리워서일까, 그 무슨 미련인지 쉰 목소리로 악을 쓰며 소리를 내보지만 그 낙엽들의 소리에 귀 기울여 주는 이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자신들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

도심에 어둠이 깔리고 아파트 칸칸마다 전등불이 하나 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나는 터서 갈라진 손가락들을 부비며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남의 물건을 훔치고 도망가 듯, 허겁지겁 추위를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빗방울처럼, 갈라진 손등위로 두어 방울 떨어졌다.

슬픔도 괴로움도 아닌 설움에 북받쳐 오른 목울대에 통증이 일어 침조차 넘길 수가 없었다. 작고 아담하고 따듯했던 온실이 사라진 지금, 남편을 향해 강한 지탄의 돌을 던졌다. 허공으로 파문처럼 번져가는 원망과 미움이 터진 살갗사이로 내비치는 핏빛 울음으로 멍울져갔다.

삶! 그것은 현실이었다. 꿈조차 허락하지 않는 긴박한 현실, 째깍거리며 쉴 사이 없이 움직이는 시계의 작은 바늘이 왜 그리도 빨리 돌아가는지... 길고 가느다란 몸을 가지고 제자리만을 뱅뱅 도는 그 바보짓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쌀자루가 가벼워질 때마다, 작은 녀석의 수업료 통지서가 날아올 때마다 나는 언젠가 영화에서 보았던 빨간 벽돌로 지어진 바스티유 감옥이 생각나곤 했다. 기본적인 생의 본능 앞에서 인간의 지성과 이성을 잃고 벌레를 잡아먹으려는 빠삐용의 처절하리만치 발갛게 충혈 됐던 그 눈빛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작은 아들 녀석이 그렇게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바라보고 씨익 웃어준다. 내 작은 가슴으로 장대비가 무수히 쏟아져 내렸다. 한숨의 벽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샘이 넘치면 맑은 소주 한잔에 꺼이꺼이 소리 내며 흘러가는 눈물줄기는 끝이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다. 빈 주머니로 작은 찻집이라도 열어서 아들 녀석들 손에 참고서 값이라도 쥐어주고 싶었다. 사정사정해서 가게를 공으로 얻고 벽지를 바르고 벽돌로 상다리를 만들고 생전에 처음해 보는 망치질을 하고 폐가에서 들고 온 목문을 닦고 다듬어 창호지를 바르고 나니 간신히 어설프고 초라한 찻집 흉내를 내어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한번씩 둘러보고 기왕 하는 김에 요것도 조것도 해야지.

말도 많고 탈도 많다. 나 역시 길도 알고 법도 안다. 허나 주머니가 빈 것을 낸들 어찌할꼬. 길 따라 갈 줄 몰라 거칠고 험한 산길로 접어들겠는가! 손은 거칠어지고 갈라지고 터져서 양손이 어쩌다 서로 부둥켜안아 볼라치면 나무껍질인 듯싶어 스스로 놀랐다. 어느 시인이 문득 바람처럼 찾아왔다.

반가움에 생각도 없이 선뜻 손을 내밀다 깜짝 싶어 나 자신도 모르게 허리 뒤로 손을 감추고 말았다. 손이 너무 거칠다고 기어들어가는 내목소리에 그는 힘을 실어 주었다. 일하는 손이 아름답다는 시인은 다시 손을 내밀었다. 따스하고 보드라운 시인의 손을 잡으며 내 손끝은 그의 따스한 마음을 판독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냄새조차 싫어하던 쓴 소주를 두잔 마셨다. 길고 하얀 손, 갸름한 손톱에 예쁜 색의 메니큐어를 바르고 털옷을 입고 아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서 있는 나를 꿈꾸고 있었다. 그럴수록 우울함과 절망의 단어만이 시커먼 모습으로 내 눈앞에 어른거렸다. 친구의 전화에 울적한 마음이라도 달래볼까 만나기로 했다. 친구는 거친 내 손을 언뜻 살피고는 말없이 핸드크림을 꺼내 내 손에 발라준다.

‘산다는 일은 누가 누구를 위한일이 아니라던’ 잘 아는 어느 시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현실은 생의 전쟁터였다. 내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그 손도 역시 고된 역군의 손이었다. 겨울이면 손은 물론 목까지 거칠게 터져 버린다며 웃는 그의 모습에서 맑고 투명한 바람이 내게로 달려왔다.

열심히 노력하고 애쓰는 손은 비록 투박하고 거칠지만 정직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말로서 포장하여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가며, 근사하고 화려하게 사느니보다 조금은 모자라고 부족 하지만 갈라지고 터져가며 내 손으로 이루어 낸 진실한 삶을 향해 서 있으리라. 누군가 반가운 사람 만나 내 손을 잡아오면 소나무 껍질처럼 거칠고 억센 손으로 그 손을 덥석 잡아 줄 것이다.
세상은 그래도 참 살만한 곳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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