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이 엄격하던 조선시대에 사림에서 중앙 정치무대로 진출하는 중요한 통로는 바로 과거(科擧)였다. 조정으로 보면 과거는 인재 등용의 수단이었으며 능력측정의 방법이었다. 식년시(式年試)는 3년마다 한번씩 정기적으로 시행되던 과거시험이었고 증광시(增廣試)는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알성시(謁聖試)는 임금이 참관하던 부정기적 과거시험이었다.

흘러간 대중가요 ‘엽전 열 닷 냥’의 노랫말 중 “내 낭군 알성급제, 성황님께 빌고 빌어...”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임금 앞에서 급제를 했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식년시는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하여 3년마다 치렀는데 분야별로 보면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로 나뉘었다. 소과나 진사과의 합격자를 생원(生員) 또는 진사(進士)라 불렀다.

초시(初試)합격자는 2차 관문인 복시(覆試)를 거쳐 33명을 뽑았고 전시(殿試)에서 성적순으로 갑, 을, 병과를 정하였다. 1차 시험인 초시에는 전국에서 대략 1천5백명을 뽑았고 2차 시 험인 복시에서 생원, 진사 1백명을 선발하였다. 이들에게는 성균관 입학의 자격과 하급관리로서의 위치가 부여됐다.

초시와 복시는 대과(大科)의 관문으로 오늘날로 치면 ‘대입 수능’에 해당하는 것이다. 대과로 가는 길은 일류대 인기학과를 합격하기만큼 험난한 길이었다. 출세의 지름길인 과거시험에도 부정행위가 수없이 많았다. 심사위원인 시관(試官)의 선정이나 대리시험 등 부정합격에 대한 잡음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 이유로 드물기는 했으나 합격을 취소하는 파방(罷榜)도 발생하였다.

세종조 때의 일이다. 시관으로 낙점을 받은 심사위원은 새벽에 응시자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 확인하고 고사장인 극위(棘圍)에 들여보냈다. 대리시험을 방지키 위함이었다. 이때 수협관(搜挾官)이 옷 속, 상자 속을 수색했고 커닝 페이퍼 문서를 소지한 자가 있으면 구속했는데 고사장 밖에서 발각이 되면 한 식년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었다.

유교사상으로 무장된 엄격한 조선조 사회에서도 부정시험은 횡행하였다. 대리시험이 있는가 하면 커닝 페이퍼를 숨기기 다반사였고 이른바 선수 유생이 모범 답안을 두 개 써서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슬쩍 건네는 ‘답안지 바꿔치기’도 있었다.

조선말,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면서 부정행위로 생원, 진사가 된 사람이 많아지자 의식 있는 학자들은 이를 창피하게 여겨 응시하지 않는 풍조마저 일었다. 선조 35년에 정시(庭試)에서 대리시험이 발각되었다. 으뜸을 차지한 답안지의 글씨가 응시자 유생(儒生)의 글씨가 아니라 그 하인의 글씨였다. 첫 장은 유생의 글씨였고 그 다음은 대서(代書)한 것이었다.

효종 원년에는 임담이 청하여 시권의 겉봉에 쓰는 ‘근봉(謹封)’ 두 자를 글씨로 쓰지 못하게 하고 도장을 새겨 과거 현장서 찍도록 했다. 응시자들이 서울의 재상이나 명사(名士)에 ‘근봉’ 글씨를 청해 고시관이 이를 알아볼 것을 우려해서다. 광주에서 휴대폰을 이용한 대규모 입시부정 사건이 발생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문자 메시지나 진동음을 이용하여 모범답안을 삼각 패스로 전송하는 기상천외한 수법이 등장했고 연루자가 1백40명을 넘는다. 당국은 입시부정행위자에 대해 종래 1년의 응시기회 박탈에서 3년으로 강화할 방침이고 금속탐지기 동원 등을 고려하고 있다. 응시기회 3년 박탈은 과거시험 한 식년(3년) 응시제한 과 같은 기간이고 금속탐지기는 수협관과 같은 성격이니 시험의 역사도 돌고 도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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