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숙(시인·서원고등학교 교사)

   
하나의 사회가 용인하고 허용하는 삶의 모습, 삶의 형태는 어디까지 인가? 사회 구성원이 만들어낸 제도나 관습에서 일탈된 삶은 불온한가? 그 사회의 보편적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불온한 것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제도권 교육에서 일탈한 사람은 어떤 집단에서도 제대로 융화하지 못할 것이라며 불온한 시선으로 보고, 평범한 결혼생활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을 불온하게 보고, 심지어 음식도 그 지역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부정되어 밥상 밖으로 밀려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꾼다. 일탈의 일환으로 가끔 여행을 떠나지만 그것은 잠시 한 호흡을 쉬어가는 삶의 환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리라. 그렇게 평소 일탈을 꿈꾸던 이들도 지속적으로 일상적 삶의 궤도나 사회적 통념의 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이 혹 주변에 있으면, 그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안정의 이름으로 편견에 가득 찬 혹독한 평가들을 매복해두었다가 비난의 화살을 쏘아댈 뿐이다.

하여, 궤도에서 일탈하는 삶은 대단한 용기를 바탕으로 한 결단이 필요한 것이리라. 그런 용기를 부여해주는 근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열정’이 아닐까 싶다.
얼마전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어댑테이션>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이 영화는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독특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유령난초로 상징화된 최상의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적 삶의 모습, 자기 삶의 숨겨진 정수를 찾으려고 하는 인물들의 치열한 모습에서 전해오는 것이었다.

<어댑테이션>은 수잔 올린의 베스트셀러 『난초도둑』과 이 책을 영화로 각색해야 하는 시나리오작가 찰리 카프우먼의 작가적 고뇌가 이중의 축으로 전개된다. 희귀난초를 찾아 눈을 번뜩이며 난초밀렵이 금지된 거대한 습지를 헤매는 존 라로쉬, 안정되고 편안한 일상이지만 생기 없는 삶에 권태를 느끼던 중 존 라로쉬라는 이단적 인물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고 존 라로쉬와 함께 유령난초를 찾아나서는 수잔, 그리고 『난초도둑』을 제대로 된 하나의 영화로 탄생시키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하는 작가 찰리 카프우먼, 이 세 인물 모두가 내 눈엔 참으로 빛나 보였다. 특히 희귀난초에 빠져 온 생애를 투신하는 존 라로쉬는 가족에게나 사회에게서나 외면당하는 이단적 삶으로 살아가지만, 난초에 대한 치열하고 진지한 순정의 열정은 언뜻 초라해 보이는 그를 더 빛나게 하는 삶의 정수로 보였다.

때로 우리 사회는 열정이 넘쳐 심지어 범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어디를 둘러봐도 어떤 열정도 없이 건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왜 이렇게 극단의 모습으로 비춰질까. 어떤 것이건 지속적이지 않은 일회적 관심 순간적 열정은 진정한 열정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잠깐 동안의 나들이 같은 관심, 기분 전환식의 열광을 진정한 열정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떤 희생이나 비난까지도 감수할 마음으로 생의 순정을 바칠 수 있는 열정적 삶의 모습이 더 그리운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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