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무릉마을 일박」 전문

깊은 산사에 어둠이 내려와
좁은 산길을 느릿느릿 지운다

온 길로 다시는 가지 말라는 듯
긴 꼬리 새가 다녀간다
감나무 꼭대기가 휘청한다.

스님은 시든 꽃처럼 앉아 소주를 마시는데
두꺼비 한 마리 걸어와 절을 한다
뭔 일 그리 깊어 밥도 짓지 않고
흐린 밤에 사시는가 묻고 싶지만
내 몸도 불빛 아래 집을 지은
늙은 거미의 배고픔에 걸려 있으니
애써 누구의 시름을 걱정할 것인가

나무 물고기는 먼 바다로 떠나고
탑도 단청도 풍경도 없는 절에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멈칫한다

─ 김병기 「무릉마을 일박」 전문[<충북작가> 30호(2010년)에서]

그림=박경수

인생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편도지요. 어둠처럼 망각의 편린들이 내려와 느릿느릿 어제를 지웁니다. 긴 꼬리 새도 온 길을 다시 가지 말라고 기억을 길게 흘립니다. 감나무도 잘 알았다는 듯 한번 출렁하네요. 스님은 또 뭔 일이 그리 깊어 밥도 잊은 채, 시든 꽃잎처럼 앉아 소주잔을 들고 흐린 밤을 사시는지. 시인 또한 먹고 사는 일로 각박하여 누구의 시름을 걱정할 처지가 못 됩니다. 스님이나 시인이나 존재의 가장 깊은 뿌리들과 엉켜, ‘밥과 절과 길’에 대해 근심하는 일로 많이 골똘합니다. 산사의 풍경이 퍽 세속적이고 누항의 수수로운 낙숫물 소리가 오히려 친근해서 좋습니다.

누가 보리달마에게 제 마음을 평화롭게 해달라고 부탁했지요. 그때 보리달마는 “어디 네 마음을 꺼내 보아라. 그러면 평화롭게 해주겠노라” 했다지요. 근심 걱정 많은 세상, 가끔 마음을 밖으로 꺼내서 찌든 때도 씻어내고, 아집과 미망일랑 바로 펴서 다시 넣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그 마음 꺼내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속세의 일이란 모름지기 알 수 없음에서 앎을 향해 나가는 고난의 도보순례지요.

김병기 시인은 시를 통해 사색하고 명상하고 깨달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시인입니다. 그래서 곧잘 자신을 ‘밥, 절, 길’에 대해 명상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사유가 너무 깊어 시가 다소 공리적일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이 젊은 시인은 보폭이 크고 넓고 진지합니다.

목어도 바다로 돌아가고, 탑도 단청도 풍경도 없는 절에 빗소리만 멈칫멈칫합니다. 산사의 일도 이렇게 비우고 비워 가면 저절로 고요의 경지에 도달하겠지요. 마음에 욕망과 위선과 편견을 버리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래서 자기 마음을 가진 줄도 모르는, 순진무구, 세파의 물결을 아주 놓아버린, 그 고요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면, 정말 우리는 무릉에서 오래오래 일박하고 있는 것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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