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직언직썰/ 오효진 소설가

오효진 소설가

나는 ‘그녀’라는 말이 싫다. 그녀는 세상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까지 일상생활에서 그녀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보통사람들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를, 어머니를, 아니 여동생이나 여자 친구를 말할 때, 누가 그녀라는 말을 쓰겠는가. ‘아버지가 어머니를 아끼신다.’는 말을 ‘그가 그녀를 아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머리가 좀 이상한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도 책만 펴면 ‘그녀’가 튀어나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보통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는 말을 글깨나 배웠다는 사람들은 왜 밥 먹듯이 쓸까. 물론 우리가 대화할 때 쓰는 말(구어체)과 글 쓸 때 쓰는 말(문어체)이 따로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글 쓸 때 어려운 말을 쓰지 말고 말하는 대로 쓰자고 하는 것이 언문일치(言文一致)다. 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바른 글을 쓰는 기본이다. 그런데도 특히 소설을 보면 그녀를 너무 많이 써서 눈에 거슬린다. 소설문장은 특히 다른 장르보다도 말하듯 쓰는 언문일치로 씌어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할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지 싶다. 그저 “사랑합니다”하면 된다. 나(1인칭)와 당신(2인칭)을 생략하는데도 뜻이 훌륭하게 통한다. 이게 우리말이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이 그(3인칭)를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하고 골머리를 앓았던 듯하다. 결국, “…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 하고 ‘저’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왜 그랬을까. 3인칭대명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 국무부에서 미국인 직원을 한국으로 파견할 때 한국어를 미리 가르치는데, 이때 선생님들이 한국에 가선 ‘나, 당신, 그’ 같은 인칭대명사를 쓰지 말라고 가르친단다. 그쪽이 먼저 우리나라 말에 대명사가 별로 쓰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대명사가 애초부터 발달하지 않았다. 대명사라 하면 한두 단어로 인칭을 대신해 부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1인칭 ‘나’는 요즘 많이 보편화됐지만, ‘저, 본인, 소생, 불초, 쇤네’ 같은 여러 말을 가려 써야 할 때가 많다.

2인칭은 당신으로만은 턱 없이 부족하다. 당신은, 부부 사이나 평교간, 아니면 좀 낮은 사람에게 제한적으로 쓰일 뿐이다. 간혹 당사자가 없을 경우 제3의 어른을 말할 때도 가끔 쓴다. 3인칭은 정말 쓰기 어렵다. 남자를 지칭하는 ‘그’ 는 고전에 쓰인 경우를 가끔 보기도 하지만, 여자를 따로 지칭하는 말은 유례를 찾기 힘들다.

이 땅에 신문학을 연 소설가들도 ‘그녀’ 때문에 고민한 흔적이 뚜렷하다. 이광수는 ‘무정(無情)’에서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고, 주인공 이름, 형식 영채를 직접 썼다. 김동인은 ‘감자’에서 ‘그’를 쓰면서 남녀를 구분하지 않았다. 황순원은 ‘그네’를 썼는데 아낙네에서 네를 따왔다고 했다. 박영준은 ‘그미’라는 말을 썼는데 아지미에서 미를 따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잘 쓰이지 않는 걸 보면 성공한 것 같지 않다.

그녀는 말할 것도 없이 외국어를 번역할 때 필요해서 만들어낸 말이다. 영어의 그 여자(She)를 일본에선 가노죠(彼女)라고 했는데 이걸 그대로 들여와 우리말로 바꾼 것이 그녀다. 그녀가 일본어 번역에서 왔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말에도 사회가 있어서 널리 쓰이면 살아남아 표준말로 승격한다. 그러나 쓰이지 않으면 죽고 만다.

이렇게 볼 때 그녀는 참 유별나다. 실생활에선 아무도 그녀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글 쓰는 사람들, 그 중에도 특히 소설가들이 이 껄끄러운 말을 밥 먹듯이 쓰고 있다. 더구나 ‘그녀는’의 발음이 ‘그년은’과 같아서 듣기에도 고약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보통 말할 때 하는 것처럼 쓰면 될 것이다. 쓰지도 않는 말을 글에서 안 봤으면 좋겠다. 나는 ‘그녀’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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