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식 「지렁이 1」 전문

흙을 파먹고 사는 지렁이의 입은
뾰족하겠지요 곡괭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삽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 구수하고 달콤한 흙을 먹는 이빨이
가끔 궁금합니다
아마 흙과 같이 햇살의 부스러기도
꺼끌한 바람의 조각도 하얀 구름 한 뭉치도
같이 비벼서 먹겠지요. 그 속에 개나리꽃 노란
꿈들도 쑥국새의 노래도 이웃 마을 처녀 총각
슬픈 사연도 같이 섞어서 꼭꼭 씹아 먹겠지요
맛있는 비빔밥처럼 말입니다
지렁이의 똥이 둥그런 것 같기도 한데
예쁘겠죠 가끔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오르면
옛날 옛적 배고프던 시절도 생각나고
산 너머 이쁜 아가씨 그리움에 잠 못 들던
시절도 생각나겠지요
흙속 지렁이의 예쁜 입을 한 번 보고 싶은데요
그냥 상상만 해 봅니다
아마도 봄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싹을 밀어 올리는 예쁜 입이겠지요

─ 박운식 「지렁이 1」 전문(시집 『아버지의 논』에서)

그림=박경수

 

산과 들에 봄이 한창입니다. 논과 밭에는 어느새 봄농사를 시작하는 농부들의 모습이 분주하고요. 구수하고 달콤한 흙을 먹는 지렁이의 입 모양이 곡괭이나 삽을 닮았네요. 흙에다가 햇살 부스러기와 바람 조각들과 구름 한 뭉치씩 넣고 맛깔스런 비빔밥을 지어 먹고 동그란 똥을 눈다고요. 또 그 똥을 먹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싹이 올라오고요. 그러고 보니 천지 만물의 생성이 예쁜 지렁이 입으로부터 시작되는 셈이네요. 봄 햇살처럼 눈부신 상상력입니다.

생명을 기르고 모시고 섬기는 일야말로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이며, 빛나는 생명의 탄생을 노래하는 것이야말로 서정시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심원한 영토입니다.

그러나 나날이 퇴락해가는 농촌을 지키며 아직도 몸부림처럼 잔존하는농촌공동체의 전통을 이어가고자 힘을 다하는 시인의 모습이 황폐한 풍경만큼이나 서글픕니다. 대지 위에 농사꾼이 제일 사랑하는 지렁이에게바치는 이 헌시는 그래서 더욱 뜨거운 감동으로 번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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