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청주는 배가 떠나가는 행주형(行舟形) 지세라 했다. 배가 물위에 떠있으니 불안정한 상태이므로 돛대가 필요했다. 청주백화점 앞에 서 있는 국보 제41호 용두사지 철당간은 용두사라는 절 입구에 위치하여 법회가 있을 때 불기(佛旗)를 내 걸던 곳이다.

토착세력의 한 사람으로 불심이 돈독한 김예종(金芮宗)이 세운 이 당간은 일차적으로 용두사지를 알리는 표석 역할을 하였지만 행주형 청주 지세의 구리돛대(銅墻) 역할을 겸하였다. 불교는 전래과정에서 토속신앙과 결합하는 형태를 자주 보이고 있는데 용두사지의 철당간도 바로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청주가 배의 형국이므로 큰 인물이나 재물을 축적할 경우 청주를 떠나야 한다는 얘기는 속설에 불과하나 오늘날 큰 인물이 잘 나지 않는 청주, 청주 지역 자금의 역외 유출 등을 보면 그 속설이 묘하게도 들어맞는다.

청주예술의 전당이 건립되면서 조형물로 용두사지철당간 복제품을 이곳에 세워놓았다. 좋게 해석하면 동서로 넓어진 청주호의 쌍 돛대 역할을 하여 배(舟)의 안정성을 돕고 있으나 이 당간의 꼭대기에 있는 금동 용두(龍頭)가 우암산을 바라보고 있어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즉 우암산은 호랑이이고 당간은 용이어서 영락없는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청주지역에 투서, 모함이 많고 큰 재력가가 파산하는 것이 여기서 연유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나 이 역시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경희 청주대 지리교육과 교수가 발표한 ‘우암산의 풍수지리적 고찰’은 또 다른 흥밋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예 교수는 ‘청주는 행주형과 더불어 날랜 범이 먹이 감을 노리는 이른바 맹호하산형(猛虎下山形)의 지세라고 밝혔다.

청주 읍성의 동쪽은 우암산~당산으로 이어지는 거대령(巨大嶺)의 지맥, 상당산의 지맥이 이루어 놓은 지형이 풍수학적으로 볼 때 ‘사나운 짐승이 산아래 평야로 내려오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 ‘청주의 동쪽에서 엎드려 있는 호랑이가 탁 트인 북서쪽에서 불어오는 개소리 바람을 맞고 좋은 먹이가 온다고 생각하며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모습’이라는 얘기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청주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아 항상 살기(殺氣)가 있다’는 언급이나 청주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이 높은 동쪽에서 낮은 북쪽으로 흐르는 역수(逆水)라는 세간의 지적은 불명예스런 일이나 자연현상을 인위적으로 할 수 없으니 이를 어쩌랴...

실제로 청주에서는 좋지 못한 사건이 발생하여 청주목이 서원현으로 강등되는 사례가 조선조에 여러 번 있었다. 연산군 11년에는 청주인이 환관 이공신을 살해하여 주(州)를 파하였고 효종 7년에는 노비의 상전살해사건으로, 영조 7년에는 무신반란(이인좌의 난)으로 서원현으로 강등되었다가 훗날 복구되었다.

청주목에는 운천동 일대에 나무를 빽빽이 심어 ‘북 숲’이라 했고 남쪽에도 같은 성격의 ‘남 숲’을 조성했다. 이는 남북으로 흩어진 지기(地氣)를 모으려는 비보(裨補)인 동시 무심천의 역기(逆氣)를 누루기 위한 인위적 조치였다.

그런데 청주가 근대화 과정에서 울창하던 북 숲, 남 숲이 없어졌으니 허허로운 지기를 무엇으로 보 할 수 있을지 난감할 뿐이다. 산남동 일대의 숲도 택지개발로 자꾸 없어지고 있다. 물론 도시의 발전 축이 남북에서 동서로 변하고 있어 종래의 풍수설을 적용하는데는 상당한 무리가 있으나 조상의 혜안도 무시할 수 없는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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