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식의 ‘톡톡 튀는 청주史’

청주 부강리 고가淸州 芙江里 古家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1호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문의문화재단지

이 집의 안채는 조선시대 후기 건물로 부용면 부강리 김종철씨가 살던 고가를 1995년 이전 복원하였다. 현재의 배치와 1982년 조사를 비교해 볼 때 원래 대문간채는 없었으며 사랑방쪽으로 출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채는 ㄱ자 형태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방 쪽은 우진각지붕이고 안방 쪽은 맞배지붕이다. 구조 양식은 민도리 3량 구조로 아담하고 소박한 민가 주택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광채는 지붕을 얇은 판석으로 덮은 일一자 행태의 돌기와집으로 중부지방의 산골부락에 많이 있었던 형식이다.

 

청주 문산리 돌다리淸州 文山里 石橋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22호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대청호반로 721 문의문화재단지

문산리 돌다리는 원래 대청댐 수몰 전에는 문의초등학교 정문에서 남쪽으로 100m 전방에 있던 것인데 1980년 대청댐 건설로 문의면 미천리에 문산관과 함께 이전하였다가 2002년 3월 문의문화재단지로 재이전하였다. 돌다리는 고려 때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교각 내에 ‘을묘이월乙卯二月’이라는 각자가 남아 있다. 교각 상판은 2.5m×0.3∼ 0.9m 규모의 화강석과 청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총 10개이며, 석주는 1.3m의 화강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청주 척화비淸州 斥和碑

충청북도 기념물 제23호
청주시 상당구 남사로 117

척화비는 조선 말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온 백성에게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일깨우고자 서울과 전국 교통요지에 세운 비다. 이 척화비는 1976년 석교동의 하수구에서 발견한 것으로, 앞면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洋夷侵犯 非戰則和],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겨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의지를 밝히고 있다. 척화비는 임오군란 후 일본공사의 요구로 대부분 철거되었다.

 

청주 손병희 생가淸州 孫秉熙 生家

충청북도 기념물 제30호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의암로 234

동학 3대 교주이며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손병희(1861∼1922)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생가는 앞면 4칸, 옆면 1칸 반의 초가집으로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961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한 유허비, 1994년에 세운 사당, 그리고 1998년 개관한 기념관이 있다. 2000년 생가터에 대한 성역화를 마무리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으로, 의암영당義菴影堂이라 하여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청주 안정라씨 삼세충효문淸州 安定羅氏 三世忠孝門

충청북도 기념물 제40호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비중리 110-1

삼세충효문은 퇴수헌 나사종羅嗣宗, 1440∼1491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충신문과 나운걸羅云傑, 1456∼1493, 그의 아들 나빈羅濱, 1473∼1495, 나린羅潾, 1475∼1495 세 부자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삼효문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나사종은 1491년(성종 22) 여진족을 막다 전사하였다. 나운걸과 나빈, 나린 형제도 부친을 원수를 갚지 못하자 3년상을 마치는 날 자결하였다. 1638년(인조 16) 나사종의 충신 정려가, 1717년(숙종 43) 나운걸 세 부자의 삼효 정려와 나사종의 벼슬과 충정忠貞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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