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자작나무 눈처럼」 전문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면
-저 나뭇잎처럼 부대끼면서도 제 갈 길을 준비하는 저 혼자의몫? -
이렇게 몸을 불태우는 생각도 없겠지
쓸쓸한 내 껍질을 빌려 먼 편지를 쓰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을 가지고 싶어 했던 날들
칼길을 지나 또 다른 세상 속으로 숨어버린 광활함이여
한평생 나무를 심은 노인의 마지막 감는 눈처럼
끝을 모르는, 끝이란 가보지 못한 자들의 넋두리이자 황무지
봄 여름 가을 겨울 뒤의 오체투지를 견딘 싱싱한,
이토록 환한 몸을 본 적이 있는가

내 다시 가슴 속의 칼길을 꺼내 저 눈 속으로 걸어가리라

눈이 멀고 천 길 낭떠러지의 얼음을 깨고 또 낭떠러지에 떨어져도
오체투지의 밝은 눈 속으로 들어가리라
그 눈처럼 살리라
자작나무 눈처럼

─ 이종수 「자작나무 눈처럼」 전문(시집 『자작나무 눈처럼』에서

 

그림=박경수

 

백두산 중턱의 울창한 자작나무 원시림은 내가 본 모든 나무 가운데 백미였습니다. 노랗게 물든 이파리들이 일제히 반짝이며 펄럭이는 가을 풍경도 좋고, 눈 속에 빽빽하게 서 있는 겨울 자작나무도 일품입니다. 눈이 푹푹 내리는 사계의 끝에서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을 가지고 싶어’ 인고의 세월을 견딘 ‘싱싱한, 이토록 환한’ 자작나무에게 다가가 다짐합니다. ‘오체투지의 밝은 눈 속으로 들어가 / 그 눈처럼 살리라 / 자작나무 눈처럼’이라고. 이런 표현이야말로 ‘자작나무 눈처럼’ 순결한 영혼을 가진 시인만이 쓸 수 있는 말이지요. 겹이미지로 다가오는 중의적 표현 또한 언어미학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백석 시인의 절창 「白樺」도 함께 읽을 기회입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 밤이면 켕켕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 감로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 산너머는 평안도 땅도 뵈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자작나무다’ 나무 하나로 이렇게 아련하고 애틋한 북방정서를 들려줍니다. 순은으로 빛나는 새날 새아침, 자작나무 눈으로 서 있는 당신을 향하여 햇살이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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