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벽력이었다. 자식 같이 키워오던 돼지를 모두 땅 속에 묻어야 하다니.
지난 4일 자신의 축사에서 구제역이 발생해 기르던 돼지 1천50마리 모두를 땅속에 묻어야 한다는 소식을 접한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이모씨는 앞이 깜깜함을 느껴야 했다.
‘빚이 1억인데...’
이씨는 어렵게 농장을 운영하다 지난해 3월 축협의 시설자금 3800여만원을 대출 받아 새로 축사를 짓고 진천읍에 있는 돼지 사육 기업 유전자원으로부터 새끼 돼지를 분양받아 3개월 가량 키운 뒤 계약 출하하는 양돈에 새로운 희망을 걸고 있었다.
여기에 가축 흑사병인 구제역이 덮친 것이다. 이씨는 이날 밀려오는 허탈감으로 진천읍내 성모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런데 많은 가축 사육 농가들의 형편이 이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소값, 돼지값이 좀 나아져 시설 투자를 하여 사육 두수를 늘리고 나면 여지없이 외부적인 악재가 터져 빚만 짊어진 채 주저앉아야 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을 통한 모 유명 의사의 채식 제일주의 강연이 육류 소비를 꺽어 축산 기반을 무너뜨렸다. 이어 영국, 대만 등지에서 터져 나온 구제역 소식은 또 한차례 축산 농가에 시름을 안겼다. 이것은 그래도 남의 먼 나라 일이어서 인지 긴 시련을 남기지 않았다. 그보다 우리나라에 몰아 닥친 IMF 사태는 사료값의 폭등으로 이어져 사육 가축을 굶겨 죽여야 할만큼 처절한 몰락을 안겼다. 이때 웬만한 가축 사육 농가는 부도를 내고 축사를 비워야 했다. 더구나 이때는 정부에서 시설 자금이 대량 지원되어 너도 나도 축산에 나섰던 때라 그 시련의 상처는 깊었다.
그러나 IMF를 지나면서 사육 두수 부족에 따른 고기값의 시세가 괜찮아지게 되었고 마지막 희망으로 축산 농가들이 다시 입식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호황도 잠시. 축산이 잘 되가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 2000년 중국에서 몰아친 황사 바람과 함께 구제역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발병함으로써 축산 농가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때 전국 6개 시군 15개 농가로 구제역이 확산되어 도살 처분과 수출 중단으로 직접적인 피해만 3000억원에 달한 것으로 농림부는 추산했다.
이렇게 축산 농가들은 깊은 굴곡을 넘나들며 어렵게 축산업을 영위해 오고 있는 형편이다. 이제 2년만에 또 다시 구제역이 발생하게 되자 축산 농가의 두려움은 보통 큰 것이 아니다.
첫째가 구제역의 직접적인 감염 피해에 대한 두려움이다. 앞으로 돼지나 소의 출하가 중단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농장에도 구제역이 발생할 수 있다는 걱정으로 일손들을 잡지 못하고 있다.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돼지 사육 농가 김모씨는 “농장에 구제역이 한 번 발생하면 이씨 농장의 예에서 보듯 가축 사육의 끝을 의미한다. 정확히 감염 경로도 밝혀지지 않아 어떻게 예방해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며 한숨지었다.
두 번째는 구제역 발생으로 소비심리 위축과 수출 중단에 따른 고기값 폭락에 대한 우려다. 현재까지는 아직 돼지고기의 가격 하락은 감지되지 않고 있으나 축산 농가들이 가장 예민하게 바라보는 부분이다.

수출 중단 이어져 피해 눈덩이

현재 진천과 안성에서 발생한 이번 구제역으로 직접적인 피해액은 200억원대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진천 이월 사곡리 이씨 농장 1천여마리를 비롯 6개 농가의 돼지 1만2천마리를 도살 처분함으로써 마리당 20만원씩 모두 24억원의 피해가 발생했고 일본의 수입 차단 통보로 제주산 돼지고기 수출이 중단된 데 따른 것이다.
구제역 발생으로 돼지고기 수출은 1년 이상 연기될 것으로 전망되어 피해 규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일본은 지난 4일 국내산 돼지고기 등의 수입을 전면 중단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지난 2000년 3월 구제역 발생으로 수출이 전면 중단되었다가 오는 6월부터 돼지 콜레라 청정국으로 지정되어 수출을 재개하게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충북도내 육가공 업체들이 당장 큰 타격을 입고 있다.
6일 필리핀도 한국산 육류의 수입 중단을 통보해왔고 러시아도 이에 따름으로써 2년만에 또다시 발생한 구제역은 ‘한국은 구제역에 잘 걸리는 인자를 가진’ 나라로 인식될 가능성마져 제기되고 있다.
대만은 지난 99년 구제역으로 축산 산업이 완전 붕괴된 사례가 있어 그 피해 정도의 심각성을 암시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제는 어느 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구제역에 대해 국가 안보 차원의 생물 안전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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